[박 상] 이원식 씨의 타격폼 (2009, 이룸)

2010. 2. 16. 00:58흔드는 바람/읽고

이원식 씨의 타격 폼
박상 지음/자음과모음(이룸)

잘 모르는 작가의 책을 대할 때는 설렌다. 지인의 추천이나 인터넷 서점의 설레발, 호평 일색의 신문 서평에 이끌려 약간은 강요받는 기분으로 책을 집어든 것이 아니라, 온전한 나의 의지로 어떤 소설을 읽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라면 더더욱 설렌다. 작가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을수록 설렘은 더 크다. 이 작가는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일까, 호기심을 가지고 책장을 넘긴다.

작가가 소설 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다면, 설렘에 반가움이 더해진다. 이 사람도 나처럼 이걸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작가에 대한 호감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싫어하는 것까지 비슷하다면 호감은 더 커진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의 글이라면 감수성이나 성격이나 취향에 분명히 큰 공통분모가 있을 것이므로, 그의 글을 정성스럽게 읽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이원식 씨의 타격폼>은 내가 처음으로 접한 박 상의 책이었다. 잘 모르는 작가의 책이었으며,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는 작가의 책이었기에 반갑고 설레는 마음으로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박 상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독자일지라도, <이원식 씨의 타격폼>을 읽고 나면 이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대충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락과 야구를 좋아하고, 돈이 인류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그래서 돈이 안 되는 일을 무지하게 열심히 하는 사람. 어떤 이들에게는 취했냐고, 장난치냐고 많이 욕먹었을지도 모르는 사람. 하지만 술이나 마약에 취하지 않더라도 세상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고 싶어 남들 눈엔 우습기 짝이 없는 개다리춤이라도 열심히 추고 싶어하는 사람...뭐, 이런 정도의 감?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찌질하고 대책없다. 그러다보니 무언가를 제대로 가진 사람이 없다. 돈이 없거나, 부모를 잃었거나, 애인에게 차인 인물들이 좌라락 등장한다. <치통, 락소년, 꽃나무>의 '나'는 소주값 1150원이 없어 무전취식으로 경찰서에 끌려오고, <이원식 씨의 타격폼>의 이원식 씨는 프로야구 무대에서 1할 5푼 8리라는 통산 타율을 기록하고 쓸쓸히 은퇴한다. <연애왕 C>의 '나'도, <짝짝이 구두와 고양이와 하드락>의 박상혁도, <춤을 추면 춥지 않아>의 '나'도 실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정점은 <체면 좀 세워줘>. 박찬호가 못 던질 때마다 옷을 벗기 시작해 바바리맨이 된 남자, 삼겹살집에 갔다가 돈 이 천원이 모자라 도망친 남자들, 라면집에서 라면을 먹다가 인류의 체면과 진화에 대해 말다툼하고 결국은 싸움을 하게 되는 선후배들 등 온갖 한심한 인간들이 총출동하는, 그야말로 찌질한 인물들의 종합선물세트라 할 만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엄청 당당하다. 자신에게 "그럼 언더그라운드 락커야?"라고 묻는 경찰 앞에서 '모르는 건 무조건 언더그라운드인가'라며 비웃음을 감추지 않고, 아버지뻘인 주루코치의 입에서 냄새가 난다며 "오! 양파 냄새! 저리 꺼져요!"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새 종이도 아닌 이면지에 볼펜으로 '사직서'라고 작렬하듯 갈겨쓴 뒤 사원번호와 이름을 써서 집어 던지고 비장하게 회사를 나서고, 또 어떤 이는 자신의 외모를 지적하는 상사에게 '그냥 되는 대로 살게 내버려두세요'라고 대꾸한다. 도대체 제정신인가 싶다.

이렇게 뻔뻔한 인간들이 단체로 등장하니 소설을 읽다보면 기가 막히고 짜증이 나야 할텐데, 묘하게 그렇지가 않다. 기존의 질서와 권위 앞에서 주눅들지 않는 척하면서 거칠게 살아가는 이 인간들이, 사실은 무지하게 외롭고 쓸쓸한 이들이란 걸, 그래서 핼리혜성에라도 올라타 자신의 팍팍한 현실이 펼쳐져 있는 지구 바깥으로 가고 싶어하는 인물들이란 걸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봐도 만만치 않은 세상, 도망쳐 버리는 게 이기는 것보다 훨씬 쉬울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한심한 인간들이 '살 수 있는' 이유는 또다른 인간들, 특히 현명한 여자들 덕분이다. <치통, 락스타, 꽃나무>에서는 현실로 떠나갔던 애인이 돌아와 유치장에 갇힌 '나'를 꺼내 주고 <춤을 추면 춥지 않아>의 착한 애인은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나'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새로 개발한 개다리춤을 보여준다. 실연한 후 풀죽어 살고 있던 <짝짝이 구두와 고양이와 하드락>의 박상혁이 자신을 괴롭히던 애인과의 기억을 덜 아파하며 떠올릴 수 있게 되는 건 애인 대신 같이 살게 된 고양이 시빌(묘하게도 암컷인!) 덕분이다. 이 현명한 여자들은 가진 게 고통스런 락정신뿐인 그들이 자신의 삶에 발을 붙일 수 있게 해 주고, 자신의 꽃나무를 피울 수 있게 도와 준다. 한 꽃나무를 위하여 그러는 것 같은 참 이상스런 흉내를 따라해 주는 것이다.

그녀들의 모습 속에서 한심한 그들을 구원해주고 살려주는 '천사 같은 여인' 혹은 어머니의 이미지를 발견하고 불쾌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들은 주는 것 없이 받기만 해야 하는 그들의 판타지가 백분 발휘된 허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 상의 소설에 등장하는 그녀들의 씩씩하고 당당하며 카리스마 넘치는-고양이 시빌마저도!-모습을 보며,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불쌍하게 헤매는 남자들의 판타지 속 '구원의 여신' 대신 능동적이고 대안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인물로서의 여성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물론 이건 박 상의 소설을 좀더 읽어본 다음에 결론을 내려야 할 문제겠지만ㅋ


'첫 번째 책'의 역할은 작가의 색깔을 살짝 맛보여 주면서도 앞으로 더욱 뚜렷해지거나 화려해질 색깔에 대한 전망을 남기는 게 아닐까 싶다. 약간은 설익고 거칠지만 작가의 개성을 뚜렷이 보여주는 작품들로 가득차 있는 책이라면, 마지막 작가의 글을 읽었을 때 '이 작가의 다음 책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해 준 책이라면, 첫 소설집으로서 실패작이라 할 순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박 상의 첫 소설집인 <이원식 씨의 타격폼>은 바로 위에 나열한 '실패작이 아닌 첫 소설집'의 요건을 충분히 갖춘 책이었다고 생각한다-적어도 나에게는. 최근에 출판된 그의 다음 책(제목이 <말이 되냐>다!)도 한 번 찾아 읽어봐야겠다.


그리고, 맘에 드는 몇 개의 문장들.



  •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고 이해받으려 하면 안 된다. 어차피 이해가 안 된다.
  • 밥을 위해 부르는 노래와, 숟가락도 버리면서 부르는 노래는 본질이 다르다. 바보들이 모르는 건 본질이다. 음악의 본질은 진짜 노래하는 것이고, 의약의 본질은 인류의 고통과 진짜 싸우는 것이다.
(p.31, <치통, 락소년, 꽃나무> 중)


  • "야구? 내가 잘 알아"라고 말하는 사람은 야구에 대해서 발가락만큼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야구에 대해 목이 쉴 때까지 말한다고 해도 야구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야구에 대해서 얘기한다는 것은 야구에 대해서 아무 얘기도 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p.68, <홈런왕B> 중)


  • 내가 야구 동호회에 가입한 것은 고등학생 여자 혼자 야구를 보면서 맥주를 마시긴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있으면 꼭 이상한 아저씨들이 집적댄다. 아저씨들이란 존재는 세상 어디에서나 기분 나쁜 짓만 골라서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미 불쾌한 짓들이 부끄럽다는 걸 잊은 것이다. 야구장에서든 삼겹살집에서든, 지하철에서든, 자기들 집에서든. 그리고 아줌마들은 그런 아저씨들과 같은 집에 산다. 맙소사.
(p.148, <외계로 사라질 테다> 중)

  • "무슨 개성이 고려의 수도인 줄로만 알아."
  • 더할 나위 없이 시끄러워진 원룸 다세대 주택의 503호 앞 복도에서 우리들은 32비트 개다리 춤을 완성해버렸다. 무릎 관절과 골반이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어두운 관계가 흔들리며 현실 세계를 떠나갔고 당장 꿈 같은 것들이 흡인되어 왔다. 다리우스 1세, 엘비스 프레슬리, 배삼룡, 김정렬 씨도 위아래층에서 마구 뛰쳐나와 춤췄다. 마법사를 태운 커다란 그레이하운드 한 마리도 어디선가 튀어나와 앞발을 들었다.
(p.171/ 186, <춤을 추면 춥지 않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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