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 무더운 여름 (2009, 문학동네)
2010. 2. 14. 23:36ㆍ흔드는 바람/읽고
무더운 여름 위화 지음, 조성웅 옮김/문학동네 |
학생 시절에 문학 관련 수업을 들을 때마다 자주 들었던 얘기 중 하나. 단편 소설은 짧은 소설이고 장편 소설은 긴 소설이지만, 단편 소설과 장편 소설의 차이는 단지 그 물리적 길이뿐만이 아니라는 것. 단편 소설은 짧기 때문에 인간 내지는 삶의 한 부분을 아주 특징적이고 압축적으로 포착할 수 있어야 하고, 장편 소설은 긴 분량 속에서 입체적인 인물의 총체적 삶을 개연성있는 이야기와 치밀한 구성을 통해 종합적으로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뭐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분량상 분명히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우연에 의존한 이야기, 단편적인 인물의 모습, 허술한 구성으로 이루어진 소설이 워낙 많은 탓에, 장편 소설과 단편 소설의 성격을 떠올리며 작품을 읽는 일은 별로 없다. 아주 가끔, 쓰잘데없이 길기만 한 장편 소설이나 단편 소설의 묘미를 느끼게 해 주는 단편 소설을 만날 때 정도. 일년에 대여섯번, 아니 서너번쯤?
오랜만에 저 '장편과 단편의 차이'를 떠올린 건 위화의 소설집 <무더운 여름> 때문이었다. 이 소설집에는 총 여섯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전율>, <우연한 사건>, <여자의 승리>, <무더운 여름>, <다리에서>, <그들의 아들> 순서로 실려 있다. 앞의 두 편에 비해 뒤의 네 편은 상당히 짧다. 특히 뒤의 세 편은 꽁트로 보아도 큰 무리 없을 글이다.
하나의 사건 내지는 갈등, 전형적이지만 매우 인상적인 인물, 이야기 전반에 가득찬 긴장감을 음미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요, 특정한 상황 속에서 비루한 인간 삶의 단면을 발견하여 끄집어내는 작가의 재주와 재기넘치는 단편 소설의 묘미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소설집이었다.
남편과 그의 불륜 사실을 발견한 아내 사이에 벌어진 26일간의 냉전을 우스꽝스럽게 그려낸 <여자의 승리>와 '나 갖기는 싫고 남 주기는 아깝다'+'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두 에피소드를 합친 듯한 <무더운 여름>, 오랜만에 재회한 여자와 남자가 대화를 통해 서로의 기억을 재구성해내며 새롭게 관계를 맺는 <전율>은 연애 관계(내지는 유사 연애 관계)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형성하는 팽팽한 긴장감을 흥미롭게 그려내고 있는 소설이다. <전율>을 읽을 때는 홍상수의 <오! 수정>이 생각나기도 했다. 뻔뻔하고 허세에 찬 지식인 남자가 등장한다는 점, 인간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가 다루어진다는 점 때문에. 그 남자(저우린)을 여봐란듯이 조롱해대는 여자(마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통쾌한 기분이 다 들었다. 결국 저우린을 쫓아냈다면 더 통쾌했을텐데ㅋ
<다리에서>와 <그들의 아들>은 가족 관계의 희비극적 단면을 매우 건조한 목소리로 전달하고 있었다. <그들의 아들>은 앞으로는 갈수록 더 어려운 날들이 이어질 것이지만 눈앞에 이미 장성한 아들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는다며 서로를 위안하는 부부와 그런 부모 따위 힘들게 살든말든 관심 두지 않는 아들의 모습을 스케치한, 전형적인 '희생적인 구세대 對 이기적인 신세대'의 이야기인 반면 <다리에서>는 아내가 임신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질겁하며 두려워하는 남편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덜 전형적이었다만 두 작품 다 가족 관계에서의 신뢰나 믿음, 책임에 대해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
가장 인상적이었던 글은 <우연한 사건>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살인 사건과 그 사건에 집착하는 한 남자, 그리고 또다른 남자의 편지가 왔다갔다하면서 진행되는 소설이라 처음엔 읽으면서도 '도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임?;' 싶었는데 결말이 가까워질 때쯤엔 놀라움의 탄성이 입에서 절로 나왔다. 두 남자가 그 사건에 대해 결론을 내리고 약속을 잡는 편지를 주고받는 장면에서는 '이러려고 그랬구나!'하며 나도 모르게 무릎을 쳤고! 이 소설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다. 소설의 주제나 등장하는 인물이 혁신적이고 훌륭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건 아니겠지만, 발상과 구성이 치밀하면서도 독특하다!
소설 뒤에는 <나의 문학의 길>이라는 토막글이 덧붙여져 있다. 제목 그대로 위화가 직접 쓴 '자기 문학의 일대기'라고 해도 될만한 글이다. 처음엔 그냥 '쪽수가 모자라서 붙인 글인가' 하고 읽었는데, 생각보다 꽤 괜찮았다. 이 글에서 위화는 발치사(이 뽑는 일을 하는 사람)에서 소설가가 되기까지의 변화, 그리고 그 이후에 소설을 쓰면서 자신이 겪은 일들, 자신에게 큰 영향을 준 소설과 작가, 자신이 생각하는 문학과 소설과 글쓰기 등에 대해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다. 가끔 작가들이 쓴 이런 류의 글을 읽고 기분이 나빠질 때도 없잖은데(자신의 재능에 대한 지나친 강조, 굳이 쓰지 않아도 될 문학 용어의 나열, 뭔 소린지 아무리 읽어도 모르겠는 '문학적 고민' 등등등......죄송하지만 참 진상이다-_-) 위화의 글은 사실적이면서도 겸손해 기분좋게 읽을 수 있었다. 다 읽고 나면 실제로 한 번 만나본 적도 없는 위화가 굉장히 인간적이고 소탈한 사람처럼 느껴지면서 위화에게 호감이 생긴다는 과외의 효과까지 거둘 수 있는 글ㅎ
마무리 삼아, 기억에 남는 구절을 몇 개 적어보면...
마란은 잠시 멈췄다 말했다. "정말 아름다운 기억이지." "확실히 아름답군." 저우린은 마란을 돌아보며 말했다. 마란이 이어서 말했다. "나중에는 추하게 변하고 말았어."
(p.62, <전율> 중. 왜 기억은 늘 현실보다 아름다울까. 그리고 왜 인간은 기억을 자꾸 추하게 현실로 꺼내올까.)
그러면 그 인간이 용서를 빌 거야. 무릎을 꿇을지도 모르지. 스스로 귀싸대기를 올려붙일 수도 있고. 그래도 마음 약해져선 안돼. 여러 번 맹세를 할 지도 몰라. 남자가 제일 좋아하는 게 맹세거든. 남자들의 맹세와 개 짖는 소리는 하나도 다를 게 없어. 믿으면 안 돼.
(p.157, <여자의 승리> 중. 배반당해 본 적 있는 언니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구절ㅎ)
며칠에 걸쳐 글을 썼다. 이를 악물고 며칠 동안 써내려가다 문득 꽤 멋있게 쓰인 한두 구절을 발견했다. 지금 보면 아마도 형편없는 문장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문장이 나를 매혹했다. 나는 그것을 일종의 보상으로 여겼다. 글쓰기 자체가 성실하게 노동한 사람에게 주는 보상. 이를 통해 글쓰기가 사람을 흥분시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글쓰기에 관한 기억에서 최초의 흥분이었다.
(p.228, <나의 문학의 길> 중. 아!)
사실 독서에는 어떤 인연이 있다. 그래서 때로는 인연이 닿지 않기도 한다. 그러면 그 작품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p.232, <나의 문학의 길> 중. 책뿐만 아니라 인간도 음악도 영화도...뭐든 그렇다, 때로는)
인간은 많은 욕망과 상상력을 가졌고, 그것을 표현할 수단을 얻길 원한다. 그러나 현실 생활은 이런 길을 허락하지 않는다. 글쓰기는 사람에게 더 많은 욕망, 더 많은 상상력, 더 많은 영감을 주고 표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 (중략) 글쓰기는 인생보다 더 기나긴 과정이다. 문학은 모든 사람보다 오래간다. 문학이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를 존경할 것이다. 당신은 스스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당신은 알 수 있는 게 있고 알 수 없는 게 있다. 당신이 해낸 모든 작업은 고통스런 노력을 거친 당신에게 문학이 베푼 약간의 은혜일 뿐이다.
(p.249, <나의 문학의 길> 중. '문학이 베푼 약간의 은혜'라는 부분에서 가슴이 벅찼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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