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 희망

2006. 6. 3. 18:59흔드는 바람/베끼고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김혜순, 문학과지성사, 1985

 

 

희망

지구가 돈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야.
누가 그런 걸 믿겠어. 누가 그걸 봤어?
지구가 둥글다는 건 더욱더 새빨간 거짓말이야.
코리아의 바다는 마라도 끝에서 떨어지고
나의 바다는 네 발치 앞에서 끊어질 뿐이야.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바쁘게 돈다는 것도 물론 거짓말이야.
다만 우리는 매일 밤 잠들었다가 매일 아침
깨어날 뿐이지. 잠들지 않는 사람은 없어.
우리가 잠들면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이곳에 깨어 있지.
우리가 외투를 벗고 잠들면 그곳 사람들이
옷을 벗고 물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여름을 펼치지.
왜 우리 뒤통수에 눈이 없는 줄 알아?
그건 그들의 낮을 볼 수 없게 하기 위해서야.
하지만 우린 전화를 걸 수는 있어.
우리의 밤에서 아르헨티나의 낮에게.
나의 겨울에서 나의 대칭점의 여름에게.
여보세요 겨울이에요.
여보세요 낮을 바꿔줘요.
참 다행한 일이야.
내가 잠들었을 때 누군가 깨어 내 인생을 차지한다는 건.
슬프게도 희망찬 일이야.
누군가 쓰러지면 누군가 일어난다는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