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흔드는 바람/베끼고

[이제니] 거의 그것인 것으로 말하기

2022년 창작과비평 봄호에 실린 시. 너무 아름다운 글이라고 생각해 한 자 한 자 베껴왔다. 함께 실린 '빈칸과 가득함'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이 시는 다음에 올려야지.

 

 

 

거의 그것인 것으로 말하기

  오래전 너는 내게 시 한편을 번역해 보내주었다. 언어의 죽음 혹은 언어와 죽음에 관한 시였고 나는 오래도록 그 시를 사랑하여 소리 내어 읽고는 했다. 이후 나는 내가 모르던 그 언어를 익히게 되었고 그 시를 번역하게 되었고 오래전의 내가 그 시를 오독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몇년 뒤 어느날 나는 네가 머물던 도시로 여행을 가게 되었고 너는 기꺼이 나의 동행이 되어주었는데. 이전에 나는 그 도시에 가본 적이 있었지만 어떤 연유로 말하지 않았고 말하지 않음으로 인해 그 도시는 처음 방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그 도시의 식물원은 처음 가보는 곳이었고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임에도 인공적 구조의 조화로움이 아직 쌓이지 않은 시간의 온기마저도 완벽하게 구현해내고 있었다. 곳곳에는 나무의 이름을 사랑해서 울고 있는 것들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고 정원사는 식물의 낱말을 가로지르며 풀과 잎과 뿌리의 시간을 지켜내려 애쓰고 있었다. 계절은 꽃과 나무들 위로 다시 돌아오고 있었지만 어떤 심장은 두번 다시 뛰지 않았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순간의 순간을 깊이 자각하게 되었을 때. 알고 있던 사실들 위로 모르던 사실들이 천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한겨울 허공에서 흩날리는 흰 눈의 하염없는 움직임처럼. 벽을 짚으며 걸어가는 눈먼 사람의 간절한 더듬거림처럼. 때로는 경험하지 않은 일이 경험한 일보다 더욱더 진실되게 여겨지는 순간이 있었고. 너와 내가 식물원의 사이사이를 걸어 다닐 때 과거의 미래의 과거의 미래의 과거를 다시 불러들이고 있다고 느꼈고. 그때. 과거의 미래의 언어의 죽음의 문장을 경유하여 도착하는 목소리가 있어 어느날의 행인은 걸어가던 자신의 걸음을 문득 멈춘다. 그러니까 우리는 오역과 오독의 결과로 다시 만나게 되었고 식물원의 한 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춘 적이 있었고. 그때처럼 너는 우리 앞에 서 있는 나무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내가 알던 이름은 아니었지만 나무의 색과 향은 남몰래 사랑해왔던 나무와 같았으므로 나는 내가 아는 나무의 이름을 너에게 일러주었다. 몇개의 다른 이름을 가진 같은 나무는 우리가 떠나고도 한참을 따라오고 있었다. 사람을 놓친 적이 있는 마음이 나무의 향기를 따라가고 있었다. 부르면 따라오는 것들은 어디에나 있었고.
  따라온다. 다시 어제의 향기 같은 것들이.
  거의 그것인 것 같은 것들이 다시 우리의 곁으로.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