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연] 표적
2020. 6. 15. 01:25ㆍ흔드는 바람/베끼고
'그러려고 태어난 영혼은 없다'는 부분에서 아득해졌다. 너무 맞다. '그럴 만 해서 그렇게 된' 존재는 없다. '그렇게 된 것'이 삶의 목적이었던 존재 역시 없다. 그런 것은 없다.
표적
-안희연 (2019년, 문학과사회)
얼음은 녹기 위해 태어났다는 문장을 무심히 뱉었다
녹기 위해 태어났다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녹고 있는 얼음 앞에서
또박또박 섬뜩함을 말했다는 것
굳기 위해 태어난 밀랍 초와
구겨지기 위해 태어난 은박지에 대해서도
그러려고 태어난 영혼은 없다
그러려니 하는 마음에 밟혀 죽은
흰쥐가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
흰쥐, 한 마리 흰쥐의 가여움
흰쥐, 열 마리 흰쥐의 징그러움
흰쥐, 수백 마리 흰쥐의 당연함
질문도 없이 마땅해진다
흰쥐가 산처럼 쌓여 있는 방에서
밥도 먹고 잠도 잘 수 있게 된다
없다고 생각하면 없는 거라고
어른이 된다는 건 폭격 속에서도
꿋꿋이 식탁을 차릴 줄 아는 것이라고
무엇이 만든 흰쥐인 줄도 모르고
다짐하고 안도하는 뒤통수에게
넌 죽기 위해 태어났어,
쓰러뜨리기 위해 태어난 공이 날아온다
당연한 말이니까 아파할 수 없어,
불길해지기 위해 태어난 까마귀들이
전신주인 줄 알고 어깨 위에 줄지어 앉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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