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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드는 바람/베끼고

[안희연] 표적

문학과사회 2019년 가을호.

 

'그러려고 태어난 영혼은 없다'는 부분에서 아득해졌다. 너무 맞다. '그럴 만 해서 그렇게 된' 존재는 없다. '그렇게 된 것'이 삶의 목적이었던 존재 역시 없다. 그런 것은 없다.

 

 

 

 

 


 

 

               표

 

                           -안희연 (2019년, 문학과사회)

 

얼음은 녹기 위해 태어났다는 문장을 무심히 뱉었다

녹기 위해 태어났다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녹고 있는 얼음 앞에서

또박또박 섬뜩함을 말했다는 것

굳기 위해 태어난 밀랍 초와

구겨지기 위해 태어난 은박지에 대해서도

 

그러려고 태어난 영혼은 없다

그러려니 하는 마음에 밟혀 죽은

흰쥐가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

 

흰쥐, 한 마리 흰쥐의 가여움

흰쥐, 열 마리 흰쥐의 징그러움

흰쥐, 수백 마리 흰쥐의 당연함

 

질문도 없이 마땅해진다

흰쥐가 산처럼 쌓여 있는 방에서

밥도 먹고 잠도 잘 수 있게 된다

 

없다고 생각하면 없는 거라고

어른이 된다는 건 폭격 속에서도

꿋꿋이 식탁을 차릴 줄 아는 것이라고

 

무엇이 만든 흰쥐인 줄도 모르고

다짐하고 안도하는 뒤통수에게

 

넌 죽기 위해 태어났어,

쓰러뜨리기 위해 태어난 공이 날아온다

당연한 말이니까 아파할 수 없어,

불길해지기 위해 태어난 까마귀들이

전신주인 줄 알고 어깨 위에 줄지어 앉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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