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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드는 바람/베끼고

[문태준] 옮겨가는 초원

나이를 먹을수록 좋아지는 시인들이 몇 있는데, 그 중 한 분이 문태준씨. 어제는 갑자기 문태준씨 시에 꽂혀서 이 시 저 시를 찾아읽어보며 너무 좋다는 말만 계속했다. 그 말 말고는 뭐 할 말이 없더라;

그 많은 '좋은 시들' 중에서 블로그에 옮겨보고 싶은 시는 바로 이 시, 「옮겨가는 초원」. 매년 새로운 팀원들과 팀을 이루는 직장에 다니고 있다보니, 전 팀원들을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애틋함을 느끼게 되곤 하는데, 이 시가 약간 그런 느낌이었다. 물론 내 상황에 빗대기에는 너무 애틋하고 아름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초원 양편으로 멀찍멀찍이 물러나 외면할 듯이 살자'라는 구절의 의미가 가슴이 찌릿할 정도로 와닿아서, 많이 뭉클한 마음으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더랜다. 역시 시인이란 아무나 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시인최고진짜최고

 


옮겨가는 초원

                            -문태준


그대와 나 사이 초원이나 하나 펼쳐놓았으면 한다
그대는 그대의 양 떼를 치고, 나는 나의 야크를 치고 살았으면 한다
살아가는 것이 양 떼와 야크를 치느라 옮겨 다니는 허름한 천막임을 알겠으니
그대는 그대의 양 떼를 위해 새로운 풀밭을 찾아 천막을 옮기고
나는 나의 야크를 위해 새로운 풀밭을 찾아 천막을 옮기자
오후 세시 지금 이곳을 지나가는 구름 그림자나 되어서
그대와 나도 구름 그림자 같은 천막이나 옮겨가며 살자
그대의 천막은 나의 천막으로부터 지평선 너머에 있고
나의 천막은 그대의 천막으로부터 지평선 너머에 두고 살자
서로가 초원 양편으로 멀찍멀찍이 물러나 외면할 듯이 살자
멀고 먼 그대의 천막에서 아스라이 연기가 피어오르면
나도 그 때는 그대의 저녁을 마주 대하고 나의 저녁밥을 지을 것이니
그립고 그리운 날에 내가 그대를 부르고 부르더라도
막막한 초원에 천둥이 구르고 굴러
내가 그대를 길게 호명하는 목소리를 그대는 듣지 못하여도 좋다
그대와 나 사이 옮겨가는 초원이나 하나 펼쳐놓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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