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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드는 바람/베끼고

[박세미] 현실의 앞뒤

자음과모음 2020년 여름호에 실린 박세미시인의 시. 박세미시인님의 시 참 좋다. 뭘 읽어도 좋다.


 

현실의 앞뒤

 

우리는 모두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한 걸음걸이를 가졌지
얼마나 각자가 위태로운지

나의 경우, 손을 최대한 부산스럽게 흔들어 
발의 게으름을 위장하는 식이란다 

친구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발에게 들려주는 애원 

지금 나는 앞뒤를 생각하고 있어 
오늘 아침 긴 다리를 가진 새가 성큼성큼 걸어와 내 옆에 섰어 새는 어느 것에도 눈길을 주지 않고 숲의 끝을 응시하기만 했지 그 눈빛에는 위태로움이 없어 나는 그만 발을 멈추고 말았어 흔들던 손도 내려놓았지 꽤 오랫동안 우리는 한곳을 바라보았어 나는 생각했지 사실 이 숲에 늪은 없었던 거야 하고 그 순간 새가 날개를 푸드덕거렸고 곧 날개를 완전히 펼치고 내 위로 솟아오르리라는 것을 직감했어 두 팔을 뻗어 새의 두 다리를 붙잡는 데 성공했지 하지만 이미 나의 두 다리는 늪에 붙들려 빠지지 않았고 

친구의 흥얼거림을 나는 아직 듣고 있어 
두 다리가 점점 길어지는데 
새와 나, 누가 더 필사적인가 
누구의 다리가 먼저 붙잡힌 것이며 
숲과 늪 중 무엇이 무엇을 가린 것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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