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911 <지금 여기의 진보> 발간기념, 홍세화 & 심보선 대담 @문지문화원 사이 (2)

2012. 9. 16. 21:03흐르는 강/소박한 박스

지난 글에 이어서. 대담 앞부분이 그동안 게으르게 사느라 잊고 있었던 고민의 지점을 새삼 짚어볼 수 있게 한 계기가 되었다면, 중반 이후는 논쟁할만한 내용들이 많이 언급되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둘 다 내게는 소중한 기회.


배제된 자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홍세화 대표의 말씀에,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용역(깡패)와 같은 비정규직에 동원되는 이들의 예를 들며 배제된 노동이라는 조건만으로 급진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편집자 분의 질문이 있었다. 소외당하는 집단 내에서 '더 배제되는 이들'과 '덜 배제되는 이들'이 서로 대립하는 현실적 문제는 나에게 너무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이라 어떻게 대답을 하실지 궁금했다.

홍 대표는 기존의 시스템이나 구조에 배제된 자들을 침투시켜야 한다는 뉘앙스의 말씀을 하시면서, 그것이 현실적으로 매우매우 어려운 것임을 인정하셨지만 그 비판은 비판을 위한 비판, 당파적 비판이라고 대답하셨다(사실 그 비판 글을 읽기 전에는 어떤 말씀이신지 명확히 이해가 안 됐는데, 후에 레프트21에서 그 글을 찾아 읽고 무슨 의미셨는지 깨달았다. 대담 때 들으며 기대했던 것보다 괜찮은 글 같지는 않았다ㅎ 너무 거친 표현인지도 모르겠지만 '정규직 노조한테 뭐라고 하지 마라-_-+'는 이상한 계급의식이 느껴져 불편했달까.

여기에 심 시인의 첨언이 이어졌는데, 이 말씀은 정말이지 금과옥조 같아! 눈앞이 확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심보선 시인은 단순히 기계적으로 배제의 논리를 대입해선 안 된다고 하시면서, '배제된 자'와 '배제되지 않은 자'를 기계적으로 구별하는 것에 저항감을 나타내셨다. 그리고 한 사람을 살필 때는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누구와 함께 있느냐, 무엇을 하고 있느냐를 함께 살펴야 한다고 하셨다. 덧붙여 배제되지 않은 자가 자리바꿈의 경험을 한다면 변화할 수 있다고. 물론 그 변화가 아주 극적이고 순식간에 일어나는 것은 아닐지라도, 분명히 자리바꿈의 경험을 한 자와 하지 않은 자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거라고. 예를 들어 용역 깡패 일을 하던 사람이 어느 날 밤새 투쟁하는 노동자들 사이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하고 시간을 보낸다면, 비록 그가 다시 용역 깡패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 경험을 하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될 거라고. 

진지하게 말씀하시는 심보선 시인.


덧붙여 심 시인은 노동자를 먹고 살기 위한 노동자, 잘 살기 위한 노동자, 함께 잘 살기 위한 노동자로 분류하시고, 먹고 살기 위한 노동자에서 함께 잘 살기 위한 노동자로 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일상과 삶과 행복과 민주주의의 문제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그런 노동자로의 변화. 노동자 개인으로서도 그렇게 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고, 이 사회 역시 그렇게 노동자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애써야 한다는 말씀이셨겠지. 이제까지 나의 노동은 무엇이었는가. 나는 어떤 노동자였는가. 첫 번째 노동자에 가깝지 않았는가. 나는 노동자라는 집단의 층위를 얼마나 섬세하게 살펴왔는가...여러 가지 고민이 들었다. 더불어 어떤 문제이든간에 기계적인 구별짓기/공식처럼 보이는 것에 집어넣기란 얼마나 위험하고 폭력적인 논리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현재까지 나의 직업을 '교육노동자'로 정의한다. 교육에 부수되는 노동을 통해 교육다운 교육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 현재까지의 두루뭉실한 정체화인 둣 하다. 그럼에도 직장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다 보면 현실의 지난함을 이유로 들며 내 노동의 가치를 충분히 실현하지 못함을 변명하는 데 급급해 한다. 직장에서의 내 노동을 내 삶과 분리하며 '그건 어디까지나 생존을 위한 것'으로 절하하기도 했다. 그것이 전혀 내 삶을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함께 잘 살기 위한 노동자로 변화해야 내 삶도, 내 노동의 영향을 받는 이들의 삶도, 나와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삶도 나아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또다시 들었다. 결국, 더 알아야 더 보인다는 말은 정말 진리인 것이다.

이음출판사 편집자분의 '희망버스는 현실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는 말씀에 대한 심 시인의 말씀도 꽤 인상적이었다. 심보선 시인은 '해고는 죽음이다'라는 구호를 언급하시며, 쌍용차 사태는 해고로 인해 '죽은 자'가 한 번 더 죽을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 말씀하셨다. 서로 얼마든지 협력할 수 있고 연대할 수 있는 노동자들을 산 자와 죽은 자로 나누는 해고, 그야말로 완벽한 분열을 이루는 방법 아닌가.

심보선 시인은 눈빛의 느낌이, 참, 좋으셨다. 맑고 따뜻하고. 정말이지 사진보다 훨씬 더 좋았다.


그러나 심 시인은 희망버스의 경험을 통해 산 자와 분리되어 있던 죽은 자가 산 자와 연대하는 모습을 발견하신 듯 했다. 희망버스의 주체는 단지 해고노동자뿐이 아니었다. 물론 김진숙이라는 걸출하고 훌륭하며 이타적이고 투쟁적인 노동자가 있었기에 희망버스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더이상 크레인 위에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절박한 심정이 SNS를 타고 들불처럼 번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니.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해고노동자를 지지하는 사람들뿐이 아니라 그들과 분열되어 있었던 '산 자'들이 함께했다는 것은 단지 걸출한 노동자 한 명의 존재로써 가능한 것이 아닐 것이다. 더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 더이상 나와 함께 하던 이들을 죽일 수 없다, 는 머리의 깨달음과 마음의 움직임이, 그러한, 희망, 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겠지.


그래서 심 시인은 단지 '복직이 되었느냐 안 되었느냐'의 여부를 가지고 희망버스의 실패와 성공을 나눌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희망버스가 존재하기 전의 세계와 희망버스가 존재한 이후의 세계는 분명 다르고, 그 두 세계의 '차이'는 아주 미약하나마 어둠보다 빛에 가까울 것이라는 게 시인이 말하고 싶어했던 것 아닐까 짐작한다. 그러니까 가시적인 '결과'에 너무 크게 연연해하지 말고, 길게 보고, 행복한 과정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오래 꾸준히 집요하게 행동해야 할 테다. 지고 이기는 것이란 한 순간에 결정되는 게 아니니까. 홍 대표 말씀을 인용하자면, "끝없이 패배하는 자"에게 "이길 자"란 없을 테니까. 산 자와 죽은 자의 연대가 느슨해졌을 때 사측(한진중공업)이 자본을 끼고 치고 들어와 연대를 갈라놓았음을 잊지 말고, 즐겁게 싸우기 위해서, 행복하게 싸우기 위해서, 산 자는 아낌없이 죽은 자와 연대해야 할 테다. 자신 역시 언제든지 죽을 수 있으니, 죽은 자가 아닌 산 자 자신을 위해서라도.


심보선 시인의 말씀을 경청하시던 홍세화 대표.





아, 이거 되게 길어지는군-_- 기록해 놓을 게 왜이렇게 많담. 나머지는 또 이어서. 쿨럭.
http://blueingreen.tistory.com2012-09-16T12:03:420.3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