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9. 12. 12:18ㆍ흐르는 강/소박한 박스
화요일 저녁, 문지문화원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이런저런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심보선 시인의 강연을 들으러 간 거였거나, 심보선 시인이 발언하시는 집회에 간 거였다면 차라리 발걸음이 가벼웠을 게다. 시와 사진과 기사로만 봐 온 '사모하는 시인님'을 직접 본다는 생각에 설렜겠지.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심보선과 홍세화를 함께 만나는 자리였기 때문에.
홍세화, 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면 저절로 심란해지고 마는 심경에 대해서는 나중에 정리해 보기로 하고-이건 부끄러움을 각오하고 내 '사상의 지도'를 정리해 보는 작업이어야 하는지라-_- 으음. 어쨌든 여전히 내게 홍세화=정치인은 어색한 조합이다. 많은 집회/시위/투쟁의 현장에 그가 나와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계속 보고 있는데도 그렇다. 심지어 '민주당 누구누구 떨어져도 좋으니 김순자/홍세화 두 사람은 국회에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진보신당에게 한 표를 던졌으면서도(죄송합니다 녹색당ㅠ) 여전히 홍세화 씨가 현실 정치인이라는 게 잘 와닿지 않는다. 가끔 그의 알콜 냄새 나는 트윗을 보면서 이런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 육식동물들의 전쟁터 같은 정치판에서 버틴다는 게 가능키나 한 일인가 싶어 내가 다 한숨이 나오곤 하는걸.
그런데 <지금 여기의 진보>라니. 통진당이 와르르 무너지고 심상정과 노회찬은 또 다른 당을 만들려 하고 이정희는 대선에 나오겠다 하고 민통당은 통진당과 야권연대 안한다 하고 민주노총은 통진당 지지 철회하고 박근혜 대 나머지의 구도가 아니라면 대선필패이므로 안철수-문재인의 연대 이외에는 해법이 없다고 수많은 이들이 예언(은 무슨ㅋ)하고 그러든지 말든지 사실 '진짜 내 편'이라 할 만한 사람을 찾겠다는 기대는 안 갖게 된 지 오래인 지금, 여기, 의, 진보, 라니. 심보선 시인을 만난다는 두근거림을 완벽하게 상쇄하고도 남는 칙칙함 아닌가.
여튼 머리통을 뚫고 튀어나갈 듯 얽히고 설킨 생각들을 억지로 구겨놓고 행사 시작 조금 전에 문지문화원에 도착했다. 센스 넘치는 문지문화원 직원 분께서 승열오라버니 3집을 BGM으로 틀어 놓으셔서 기분이 약간 상큼해졌다ㅋㅋ <지금 여기의 진보>를 한 권 구입하고, 텅 빈 맨 앞줄 가장자리에 앉아, 약간은 수줍은 표정으로 대담 장소에 입장하시는 심보선 시인과 홍세화 대표를 기다렸다. 행사는 7시 5분쯤 시작되었다. 이음출판사의 편집자 분께서 진행하셨고, 편집자 분의 질문에 두 분이 대답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녹음을 하면서 들은 게 아니라 듣다가 '이건 좀 적어 두자'라는 생각이 드는 때만 적으며 들은 것인지라 블로그에 옮긴 게 '정확한 워딩'은 아니라는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진행되었던 대담의 내용을 좀 옮겨보자면...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서' 자신이 서 있는 지금의 자리에 대해 이야기해달라는 질문으로 시작됐다. 홍세화 대표와 심보선 시인이 작년 희망버스 때 처음으로 만났다는 것이 화제의 시발점이었다. 현실 정치인이 되어 정신없이 한 해를 살아왔다는 홍 대표의 말씀을 들으면서, 작년 가을, 그가 진보신당 대표로 나선다는 글(http://bit.ly/U6zRN5)을 반복해 읽으며 홍세화마저도 현실 정치인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의 사악함에 황망함을 금하지 못했던 기억이 새삼 떠올라 왠지 마음이 시렸다.
심 시인은 홍 대표의 말씀에서 '내가 예측하지 못했던 공간에 내가 놓여있다는 당혹스러움'이 느껴지셨다며, 자신에게는 사회적 발언/참여의 경험이 그 정도까지의 당혹스러운 변화가 아니었다는 뉘앙스의 말씀을 하셨다. 친구(진은영 시인)의 요청에 부응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시작된 것이 모르는 사람들, 새로운 사람들(대표적으로 송경동 시인)과의 만남을 통해 점점 더 넓어지고 깊어졌다는 느낌? 그 과정에서 사람들과의 만남 역시 중요한 경험이었지만 '(시인이) 왜 거기 있냐'는 비판을 받는다는 경험 역시 중요한 것이었다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을 지속시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경험했던 나에게는, 참, 부러우면서도 공감되는 말씀이었다.
이어 홍 대표의 '통합진보당 사태'로 대변대는 현재 진보정치의 현실에 대한 발언이 이어졌다. '진보정치가 어떻게 이렇게 지리멸렬해질 수 있나'라고 생각하게 한 사태라며, 현실에 대한 진단이 부족한 상태에서 국회의원 의석 더 내는 것을 해결책으로 생각한 것이 현재 진보정치의 현실이고, 그것이 통합진보당 사태로 나타난 것이라며 '파국'과 '절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지금 여기의 진보>에서 그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에 심보선 시인은 미국에서 풀뿌리운동으로 시작한 사회운동, 즉 정체성에 기반한 여성/흑인/성소수자 운동 등이 풀뿌리운동에서 벗어나 워싱턴으로 진출하면서 이익집단과 같은 정치적 로비 전문집단이 되어 버린 것이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불러오게 되었다고 첨언하셨다. 우리는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어떻게 이익을 대변할 것인가, 어떻게 자기 표를 더 끌어모을 것인가, 를 중요한 의제로 설정하면서 목소리를 박탈당하는 자들이 나타났고, 오히려 그 과정에서 우파 운동집단이 풀뿌리 운동집단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다행(!)인 것은 그렇게 목소리를 박탈당한 자들이 기존의 '운동 집단'들과 다른 방식으로 조직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예로 드신 것이 희망버스. 배제된 자들이 모여 행복해했던 그 경험을 되짚으시면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고 생각해요"라고 말씀하시는 심 시인의 모습에서 왠지 울컥, 했다. 참 당연한 말인데, 묘하게 벅찼던 건, 내가 충분히 싸우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까.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홍 대표가 말씀하셨던 것도 기억에 오래 남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체적 자아가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가, 내면화된 자본주의에의 굴종/복종을 버리는 길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이것이 홍 대표가 생각하는 진보정치의 역할인 듯 했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갈 수 있는 주체적 자아가 형성되려면 우리가 사는 사회에 대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하고, 주체와 주체와의 만남이 인간 삶의 내용이어야 한다는 말씀은, 마음에 오래 새겨야 할 말씀이었다. 자본주의 사회가 모든 논의의 시발점이 아니라 종결지가 되고 있는 현실이 문제라는 심 시인의 말씀 역시 마찬가지. 인간답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하다가 '그래도 자본주의 사회(인데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걸 알)잖아'라는 말로 고민을 엎어버리지 말고,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답게/주체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백 사람이 한 번 내 시를 읽어주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 번 내 시를 읽어주는 게 좋다'며 가끔 집회 때 많이 본 흔적이 있고 지문도 묻어있고 낡아진(!) 시집을 가져와서 사인 받는 사람이 있을 때 기분 좋으시다고 한 심 시인의 말씀에 '책이 구겨지지 않게 아껴 보는' 습관을 심 시인의 두 시집에는 적용하지 말자고 다짐. 시간 날 때마다 펴서 계속 보고 보고 또 보기로 마음먹었다. 꽂히는 건 트위터에 올려둔다. 현재 세 편 트윗함ㅋ
아, 두분 사진도 더 있고 엄청나게 인상깊었던 말씀도 더 많이 남아 있는데 순서대로 쓰려니까 또 끝없이 길어지네요^^^^^^ 더 남은 얘기는 다음 포스팅에서. 으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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