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복] 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
2016. 8. 8. 02:26ㆍ흔드는 바람/베끼고
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강이 하늘로 흐를 때,
명절 떡살에 햇살이 부서질 때
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흐르는 안개가 아마포처럼 몸에 감길 때,
짐 실은 말 뒷다리가 사람 다리보다 아름다울 때
삶이 가엾다면 우린 거기
묶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라는 선언만큼이나 더 마음에 와닿는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는 구절이다. 일상의 순간순간, 지금의 시간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해 본 적이 과연 내게는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비일상 속에서야 자주 그런 순간들을 맞닥뜨리지만 일상 속에서는 그런 마음을 가져본 적이 거의 없다. 비루한 시간들을 그저 버티고 있는 것, 그 이상을 내가 과연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더불어 짐 실은 말 뒷다리가 사람 다리보다 아름다울 때를 포착해내는 이성복 시인의 눈에 감탄한다. 나의 삶에 대한 연민 대신, 타인에 대한 연민, 다른 존재에 대한 연민을 더 많이 지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자기연민은 하고 싶지 않다. 내 삶이 나를 사랑하여 내가 아프다면, 아픈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겠다. 그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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