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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달, 멍든 마음

[시사인] 영화음악 감독 방준석의 음악세계 (2018년 12월)

늦게나마 스크랩해놓는, 작년 12월의 시사인 기사. '허클베리핀 이기용이 만난 뮤지션'이라는 시리즈 기사의 하나다. 시작하는 문장이 위암에 대한 것이어서 마음이 아프다. 전체적인 기사에도 오빠가 앓으셨던 그 병의 흔적이 짙게 묻어 있어서 읽는 내내 마음이 많이 아프다. 준석님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원문링크는 여기. 본문 강조는 내 임의대로. 이 글씨는 내가 덧붙인 말들.


영화음악 감독 방준석의 음악세계

방준석은 현재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대표적인 영화음악 감독이다. 고약한 형태의 위암을 자연치유법으로 이겨낸 이후 그는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는 음악으로 크게 나아갔다.

방준석은 현재 가장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대표적인 영화음악 감독이다. 그가 작업한 작품은 〈신과 함께〉 1·2편부터 〈사도〉 〈베테랑〉 〈라디오스타〉 〈공동경비구역 JSA〉까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굵직굵직한 영화들이다. 1994년 모던록 밴드 ‘유앤미 블루’로 음악 생활을 시작한 그는 록의 문법에 더해 클래식, 국악까지 아우르며 영화마다 다양한 서정을 입혀온 작품들로 청룡영화상 음악상 두 번, 대한민국영화대상 등을 수상했다. 그가 발표한 영화음악과 음반은 역시 한국 대중음악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작품들이다. 그리고 그는 현재 화가이자 뮤지션 백현진과 함께 프로젝트 밴드 ‘방백’을 만들어 활동 중이다. ‘유앤미 블루’에서 최근의 ‘방백’까지 그의 작품을 시간에 따라 듣다 보면 그의 음악이 변모해온 여정이 남다르다. 음악은 때로 어떤 한 개인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격렬히 투쟁한 삶의 결과이기도 하다. 영화 〈사도〉의 ‘만조상해원경’에서 보여준 주술과도 같은 사운드는 그만큼 강렬했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에게 그런 소리의 변화가 생긴 걸까? 김포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서 만나 삶을 바꾸게 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기용: 요즘은 어떻게 지내나?

방준석: ‘방백’의 공연팀 8명과 김포 작업실에서 신곡 녹음 작업을 종종 하고 있다. 방백의 신곡!!!!!!

 

이기용: 10대 시절을 해외에서 보낸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나? 아니 의외로 이렇게 뻔한 질문을...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준석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나 준석님을 낯설어하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 당연히 해야 할 질문이겠군 하며 수긍하는 걸로...

방준석: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부모님'이 아니라 '부모'라고 준석님이 말씀하신 걸까?를 따라 칠레로 이민을 갔다. 그곳에서 혼자 있을 때 라디오에서 나오는 여러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 무렵 내가 그린 그림을 보면 무대 위의 밴드들이 참 많다. 아마 밴드라는 것이 내겐 막연하게나마 뭔가 이상적인 모습이었나 보다. 고등학생 때 밴드를 만들어 칠레의 여기저기로 불려 다니며 공연을 하게 되었다. 남미 사람들 특유의 뜨거움으로 우리 음악에 시끌벅적하게 소리치고 박수쳐주었다. 그런 모습에서 그들에게 환영받고 격려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참 좋았다. 그렇게 점점 음악에 깊이 빠져들었던 것 같다. 준석님과 승열님의 색깔이 비슷해보이면서도 다른 것도 이 유년 시절에 기인하지 않을까 싶다. 준석님이 칠레에서 외국 생활을 시작했다면, 승열오빠는 바로 미국행을 하신 거니까. 나한테는 20대의 승열오빠가 좀더 진지하고 외로운 사람처럼 느껴지고, 20대의 준석님은 (상대적으로) 좀더 여유롭게 느껴진달까.

 

이기용: 이승열 씨와 함께한 ‘유앤미 블루’의 음반은 한국 모던록의 고전으로 꼽힌다. 벌써 20년이 넘은 일인데 지금 돌이켜보면 어떤가?

방준석: 뉴욕에서 대학 다닐 때 이승열을 만났다. 그렇게 둘이 의기투합해 밴드 ‘유앤미 블루’를 만들었지만, 정작 한국에서 활동할 때는 관객이 한 명이거나 아무도 없을 때도 있었다. 나중에 우리 음악을 좋게 평가해주어 감사하지만, 당시 ‘유앤미 블루’는 나나 승열이에게 좋은 기억보다 힘든 기억이 훨씬 많다. 인간시대 생각나네요ㅠㅠㅠㅠㅠㅠㅠ 유앤미블루가 결국 다시 앨범을 내지 않은 것에, 저 이유도 없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이제는 든다.

 

이기용: 영화 〈사도〉 음악을 들으며 인터뷰하러 왔다. 많은 것을 통과한 사람이 만들어낸 음악이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나?

방준석: 6년 전쯤 암에 걸렸다. 좀 고약한 형태의 위암이었다. 병원에서는 당연히 수술을 권했지만 나는 수술과 항암치료 등을 거부하고 자연치유법을 택했다. 지금은 다행히 암세포가 모두 사라졌다. 그렇게 회복을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이던 중, 몸이 아픈 것은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라는 걸 새삼 알게 됐다.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내가 튀는 게 중요했다. 그래야 자존감도 커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것은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밑 빠진 항아리에 물 붓기 같은 것이었다. 그냥 이 문장 문장들이 너무 다 마음아프다...............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것이었다는 건, 그만큼 준석님이 괴로우셨다는 뜻일 테니까.

 

이기용: 그렇게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었다고 했는데, 음악에는 어떻게 영향을 미쳤나?

방준석: 좋은 소리를 좋은 의도로 음악에 실어야 한다는 생각이 커졌다. 음악이란 사람의 마음이 실리는 작업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그래서 작은 소리 하나에도 더 정성을 기울였다. 영화계는 ‘가성비’가 중요한 곳이지만 나는 좋은 소리를 얻기 위해 더 많이 투자했다. 더 좋은 소리를 사람들에게 들려주면 그것이 누군가에게 가서 좋은 일이 될 거라는 믿음에서다. 누군가에게 가서 좋은 것이 될 거라는 믿음으로 준석님이 만들어주신 게 더 좋은 소리니까, 결국은 준석님의 소리가 누군가에게 더 좋은 일을 선사한 거다. 그 누군가 역시 자신의 것을 더 좋은 것으로 만들어내어 세상에 돌려주겠지. 너무 아름다운 문장이다ㅠㅠ

 

이기용: 작업실 테이블 위 여러 과학자나 철학자의 책이 눈에 들어온다. 이런 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방준석: 예술가란 늘 경계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탐험하는 사람들 같다. 우리가 애초 음악을 하게 된 것도 ‘사회에서 이곳이 중심이야’라고 말하는 가치관에 대해 ‘아니야, 꼭 그렇지는 않아’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는 의미다. 내가 몸과 마음이 아픈 와중에 꽂힌 게 노자와 장자였다. 양자물리학에도 흥미를 느끼게 돼서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데이비드 봄, 닐스 보어, 조셉 캠벨, 카를 융 등의 책을 보았다. 그러다 보니 인간은 신화가 필요한 존재라는 생각도 하게 됐다. 어쩌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왔지?(웃음). 아니 어쩌면 문장 하나하나가 이렇게 주옥같은 것인가...

 

이기용: 지금 음악감독으로 일하고 있는 영화라는 게 신화의 속성과 닮았다는 뜻인가?

방준석: 그렇다. 사람들이 신화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영화라고 생각한다. 〈스타워즈〉는 영웅이 부름을 받아서 어떤 여정을 겪으며 적을 무찌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는 간단한 이야기다. 관객들은 두 시간 안팎 동안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서 심리적인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 영화의 틀이 바로 신화의 틀과 매우 유사하다. 우리가 주입받은 세계관은 너와 나는 경쟁해야 한다는 분리된 세계관이지만, 신화는 우리 모두 결국 하나이고 다 연결되어 있다는 세계관이다. 결국 너와 나의 세계가 모두다 이어져있고, 그래서 인간은 서로를 돕고 서로 함께하는 길을 찾아야한다는, 서로에게 친절하고 서로를 위해야한다는, 그 믿음이, 선한 태도가, 아름답고 슬프다. 이게 오빠가 병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깨달으신 점이라니, 진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심정이다. 아니 준석님 영혼이 너무ㅠㅠ 너무 아름답잖아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기용: 영화 〈사도〉부터 국립국악원과 작업한 국악극 〈꼭두〉 등 우리 전통음악과 관련한 작업을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계속했다. 특히 〈사도〉에서 ‘만조상해원경’은 토속음악의 힘을 느낄 수 있었는데?

방준석: 〈사도〉 시나리오가 처음 나왔을 때 정조가 춤을 추는 후반부 장면에서 사실 피아졸라의 ‘오블리비언’이 나오게 되어 있었다(웃음). 이준익 감독과 상의한 끝에 출구를 찾았다. 나는 〈사도〉의 국악 부분을 트랜스(trans) 음악이라고 이해했다. 즉 어떤 경계를 넘어가는 것 말이다. 사물놀이나 테크노 음악이나 아프리카의 타악기 리듬이나 다 트랜스적인 면에서 보면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토속음악 안에 모든 음악의 요소가 이미 들어 있다는 생각에 〈사도〉에 나오는 국악 ‘아모리’ 부분을 만들었다.

 

그는 몇 년 전에 있었던 시련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커다란 축복이었다고 말했다. 그가 겪어온 것들은 자신의 예민한 음악적 촉수를 통해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는 음악으로 변모했다. 그와 나눈 대화를 짧게 줄이면, ‘느끼는 자’에서 무엇인가를 ‘통과한 자’로 그가 바뀌어온 이야기일 것이다. 그가 작업 중인 ‘방백’의 다음 앨범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오빠의 말에 공감되는 부분이 너무 많다. 준석님이 투병하던 시기를 떠올릴 때마다, 그때 아빠를 간병하던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오빠가 아프셨던 시기가 아빠가 아프셨던 시기와 비슷하게 겹쳐서 늘 더 마음이 아프고, 더 슬프다. 근데 그때 나도 저런 생각을 많이 했다. 아빠가 아프셔서 너무 슬프고 고통스럽고 괴로웠지만, 그 시간 동안 나는 평생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늘 거부하려고만 했던 아빠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됐고 더이상 거부하지 않게 됐다. 아빠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고 사랑하는지 충분히 느꼈고, 아빠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빠의 마지막을 함께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빠가 아픈 시간 내내 힘들었지만, 그 시간이 있어서 내 인생은 조금이나마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뀌었다. 나라는 인간이 조금이나마 덜 나쁜 인간이 됐다고 생각한다.

시련이 가장 커다란 축복이었다는 준석님 말씀에, 눈물이 핑 돌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시련이 준석님에게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더 아프지 마세요 준석오빠. 건강히, 오빠의 좋은 음악, 들려 주세요. 들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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