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른 달, 멍든 마음

준석님, 고마웠어요. 감사합니다.

일년에 잠이 안 오는 날은 하루나 이틀 정도밖에 없는 인간이 나다. 잠이 안 와서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다. 하지만 어제는 잠이 안 왔다. 울다가 병원에 갈 시간을 놓쳐버렸다. 처음에는 빈소에 갈 자신이 없어서 준석님이 계실 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뉴욕으로 가신다는 걸 깨닫고 정신이 들었다. 그렇다는 건 월요일이 지나면 영영 한국을 떠나신다는 거잖아. 안그래도 계속 울던 차였는데 눈물이 더 났다. 꼭 가고 싶었다. 진짜로 마지막이니까, 준석님 얼굴을 사진으로라도 보면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다. 사람이 없는 시간에 조용히 갔다와야겠다 싶어 새벽같이 집을 나섰다.

첫차를 탈 생각으로 집을 나와 하늘을 보는데, 저 달이 떠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보름달보다 더 좋아하는, 그믐달. 앞으로는 저 달을 볼 때마다 이 새벽이 생각나겠구나 싶었다. 솔직히 이날 하루, 뭘 봐도, 뭘 들어도, 뭘 읽어도, 다 준석님 생각이 났다. 승열오빠 생각도 같이 났다. 슬프고 걱정되는데 사실은 내 슬픔도 잘 주체 못하겠고. 그래서 스스로가 싫었다. 하루종일 그랬다.

3호선을 오래 타고 일원역에 도착했다. 내리자마자 삼성서울병원 글자가 보여서, 가슴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1번 출구로 나가니
바로 앞에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었고, 금방 강남01번이 도착했다. 두 정거장을 거쳐 장례식장 앞에서 내렸다. 이미 날이 밝아 있었다.
황망한 마음으로 걸어가는데…꽃이 피어 있었다…올해 처음으로 본 하얀 벚꽃이 이곳에 피어 있었다. 준석님처럼 하얀, 벚꽃이.

장례식장까지가 너무 가까워서 더 실감이 안 났는데, 1층에 들어가자마자 준석님 얼굴이 보였다. 이름도 보였다. 진짜로 저 사진이 영정 사진이었다. 2009년 유앤미블루 공연을 한창 하시던 시절에 찍으신 사진이었다. 2010년대에 준석님이 투병하시던 시절 이전의 사진. 지금의 준석님보다 열 살도 이전 사진. 그때는 내가 이 사진을 오늘 여기서 이렇게 볼 거라고, 상상도 못했지. 과거의 내가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던 미래에 지금의 내가 있다. 비극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안그래도 준석님을 제외한 분들은 다들 어르신이어서 사진 속의 오빠가 더 젊어 보였고 더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그냥, 죽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왜 준석님은 돌아가시고 나는 살아서 내가 이런 오늘을 맞게 된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의 빈소는 지하 1층, 14번이었다.
금방 찾았지만 들어갈 수가 없었다... 저 화환의 리본들을 보는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배우 이광수가 눈에 먼저 띄었는데, 배우 조승우가 보이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준석님에게 많이 각별한 배우일 조승우씨. 나도 이렇게 속이 찢어질 것 같은데, 조승우씨는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그 외에도 아주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고 있겠지, 그냥 한낱 팬인 내 마음이 이렇게 아픈데, 그냥 눈물만 나는데, 눈물이 너무 많이 나는데, 준석님과 많은 시간을 보냈고, 함께 작업을 했고, 함께 음악을 만들었고, 함께 웃었고, 함께 노래했고, 함께 친구로서 살았던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슬프고 아플까. 그분들께도 준석님은 경탄할 만큼 다정하고 아름답고 따뜻한 사람이었을텐데, 얼마나 준석님이 그리울까. 아...이걸 쓰는 이 순간도 돌아버릴 것 같다. 대체 나 이걸 왜 쓰고 있는 거지......

하지만 마무리해야 한다. 충분히 슬퍼하고 충분히 준석님을 그리워하고 충분히 준석님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지 않으면 2022년 3월 26일부터의 세상을 잘 살 수가 없으니까. 마쳐야 한다. 마치자.

 

잠시 밖에서 울다가 다시 들어갔다. 팬인데 조문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상주분들이 자리를 비우셨는데 괜찮냐고 상주 대신 자리를 지키시던 분들이 말씀하셨다. 나에게는 다행이었다. 슬프실 가족분들 앞에서는 슬픈 마음을 참아야 했을텐데, 가족분들이 안 계신 덕분에 참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리고 빈소에 들어갔더니, 준석님 사진이, 국화 속에, 있었다. 준석님. 준석오빠. 왜 여기 계세요. 오빠 사진이 왜 여기 있어요.

마지막 인사를 잘 하려고 했는데, 저 말을 겨우 하고 나니까, 아무 말도 만들어지질 않았다. 바로 이 뒤에 준석님 관이 놓여 있을 거고, 내일이면 준석님은 이대로 천안에 가실 거고, 그런 후엔 뉴욕으로 가실 거고, 나는 준석님의 어떤 흔적도 영영 볼 수 없겠지. 나는 그저 준석님을 좋아하는 팬에 불과하고, 준석님과 공유하는 추억도 없다. 그저 나 혼자 간직하는 기억들만 있을 뿐이다. 사진 찍는 걸 싫어해서 준석님과 같이 찍은 사진도 없다. 어쩌면 준석님이랑 사진 한 장도 안 찍었을까. 언젠가는 찍을 수 있을 줄 알았겠지. 멍청하게도. 인간의 시간이 얼마나 유한하며 기회란 지극히 한정적인 것임을 잘 알면서도 그럴 줄 알았겠지. 그저 울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방해해주지 않으셔서, 한동안 울었다.

 

준석님 앞에 향을 피우고, 꽃을 놓고, 기도를 하고, 다시 준석님께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나왔다. 그러고 나니 상주분들 대신 자리를 지키시던 분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분들의 붉은 눈이 보였다. 아픈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비쳐져 있었다. 감사 인사를 드리고 나니 또다시 눈물이 났다. 빈소를 나와 또다시 울었다.

밖으로 나오니 하늘이 너무 파랬고, 준석님은, 준석오빠는, 유앤미블루고, 블루인그린이었고, 그래서 나는 모든 게 더 원망스러워졌고, 더 서러워졌다.

이 봄 내내, 이 꽃을 볼 때마다, 준석님이 생각나겠지. 하늘이 파랗고 꽃이 눈부시게 희면, 준석님 생각이 나겠지.

준석님. 이 3월이 너무 길고 너무 슬퍼요. 모든 게 원망스럽고 그저 허탈해요. 막막해요. 왜 저는 오빠 대신 류승완감독님이 상을 받는 사진을 보면서도 오빠가 아플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진짜 이제는 아무 일도 없는 줄 알았어요. 다신 아프지 않으실 줄 알았어요. 사실은 그냥 제 바람이었는데, 그게 사실인 줄 알았어요. 제가 오빠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걸 원래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보니까 진짜로 아는 게 없더라고요. 저는 그냥 오빠 노래 좋아하고 오빠 목소리 좋아하고 오빠 연주하시는 거 좋아할 뿐이지, 오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더라고요. 근데 이런 저도 너무 슬퍼요. 이틀 내내 정신이 나간 것 같은 기분일 정도예요. 발인 시간인 오후 한시 반부터 저는...대체 무슨 생각으로 스스로를 부여잡고 있을까요. 상상이 안 돼요. 예측도 안 돼요. 월요일의 제가 그저 아슬아슬해요. 그럴 정도로 이렇게 슬픈데, 오빠가 소중히 하던 사람들은, 오빠가 친밀히 지내시던 분들은, 오빠가 곁에 두셨던 분들은, 얼마나 많이 슬프고 괴로우실까요. 얼마나 오빠를 많이 그리워하고 계실까요. 얼마나 오빠로 인해 많은 눈물이 떨어질까요.

그만큼 준석님이 중요한 분이었던 거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던 분이셨던 거죠. 오빠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던 거죠. 그 중에 한 사람이 저라서, 저는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오빠. 이렇게 마음이 아플 정도라면 차라리 오빠를 좋아하지 않았던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아주 잠깐은 했지만, 그러기에는 유앤미블루가, 이승열과 방준석이, 저에게 너무 중요하고 너무 큰 이름이라서, 그 어떤 것도 삶에서 없던 것으로 할 수 없어요. 지금 이렇게 슬퍼도, 유앤미블루를, 이승열을, 방준석을 아끼고 애정했던 시간들이 저에게 너무 큰 기쁨이었기 때문에, 이 슬픔을 기꺼이 감당할 거예요 저는.

준석님, 준석오빠, 그동안 고마웠어요. 앞으로도 쭉 감사할 겁니다. 잊지 않을게요. 지금의 슬픈 마음이 무뎌지지 않게 할게요. 많이 슬퍼하고, 깊이 추모하고, 오래오래 기억할게요. 오빠가 주고 가신 아름다운 것들이 사람들에게 큰 선물로 오래오래 남아 있는 모습을,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봐 주세요. 편히 쉬세요. 더는 아프지 마세요. 조금의 고통도 느끼지 마세요. 오빠 덕분에 행복했어요. 행복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보기
정말 좋아했어요. 앞으로도 마찬가지예요. 고맙습니다 오빠. 감사해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