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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드는 바람/보고

런온 - 무해하고 청량한 21세기 판타지🎈

프렌즈 정주행이 끝난 후 뭘 볼까 하다가 런온을 골랐다. 사실 나는 임시완배우와 신세경배우의 주연작을 하나도 본 적이 없다(뭘 자랑이라고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 앞 문장을 쓴 후 정말 하나도 본 게 없나 하고 뒤져봤더니 진짜로 없었다. 출연작 중 그나마 본 건 음…변호인하고 어린 신부(아 창피하다)……… 아니다 주연작 하나 있네 뿌리깊은 나무!!!!! 하지만 이건 한석규아저씨중심으로 봤던 거라 써놓고 나니 더 민망하다. 그냥 이 문단 통째로 줄그어버려야겠어…………😣

 

애니웨이. 얼마전 방구석1열 설경구배우편을 보는데 불한당 장면이 나왔다. 그렇다 나는 불한당도 보지 않았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런데 중간중간 지나가는 불한당 장면 속 임시완배우의 '웃는 얼굴'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생명체야 신비로워🤫 하고 새삼 경탄하다가 예전에 민우회의 쏟콘빛 콘텐츠(쏟아지는 콘텐츠 속 한줄기 빛: 그러니까 '유해한 콘텐츠의 우주 속에서 비교적 추천할 만한 콘텐츠'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로 런온이 올라왔던 기억이 떠올라 한번 봐볼까 하고 넷플릭스 클릭. 그리고 오늘 정주행 완료.

 

기선겸에게 분홍색을 입히고 오미주에게 푸른색을 입힌 것부터 제작자분들 배우신 분들🤗🤗🤗🤗

솔직히 하루에 한 두 편 정도 보면서 쉬엄쉬엄 볼 생각이었는데 3일만에 다 봐버렸다 세상에... 한 2회 볼 때만 해도 하루에 두편 이상 못 볼 줄 알았는데. 왜냐면 내가 기본적으로 로맨스에 큰 관심이 없어서;; 아 물론 러브라인 없는 콘텐츠를 찾기가 쉬운 일이 아닌 건 아는데 '대놓고 헤테로 연애 얘기'하는 콘텐츠에는 손이 잘 안 간다. 로맨스에 대한 항마력이 낮은 편이랄까. 로맨스를 보다 보면 뭐랄까 '아아 오늘은 여기까지' 같은 자체한계선이 자동발생해서 자꾸 멈추거나 건너뛴다. 남들 다 본 가을동화 겨울연가 여름향기 파리의연인 풀하우스 로망스 온에어 커프 파스타 주군의태양 그사세 별그대 연애의발견 시크릿가든 상속자들 신사의품격 태양의후예 사랑의불시착 갯마을차차차 왜 저는 다 안봤을까요? 답은 '안 본 게 아니라 못 본 거'.

 

지금보다 더 어린 시절에 내 또래의 배우들이 나오는 작품을 볼 때는 '아 저 지긋지긋한 이성애'로 정리되는 염세감과 회의감이 워낙 커서(거기에 로맨스에 대한 항마력 덧붙음) 더 잘 못 봤다. 그나마 지금은 주연을 맡는 배우들이 대부분 나보다 한참 어리기 때문에 '아유 젊은이들 아름답네' 하는 마음이 생겨서 좀 너그러워짐. 김사부 시리즈도 본방 때는 '아유 그래 서정이 예쁘네 은재 너무 예쁘지 아유 윤아름선생님 너무 귀여우시네' 하면서 강동주-윤서정, 서우진-차은재, 윤아름-박은탁 장면을 봤지만 재방 볼 때는 다 건너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신기하게도 런온은 큰 거부감 없이 쑥쑥 진도가 나갔다. 대체 왜지?(→평소에 엄청 자주 쓰는 말인데 드라마 속에서 서대표가 이 말을 자꾸 써서 보다가 빵터졌었다. "왜지?" "왜지?" "왜지?"ㅋㅋㅋㅋㅋㅋ) 하고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등장하는 인물들의 무해함이 가장 큰 요인인 것 같다.

 

인물관계도만 보면 '서로 다른 계층의 인물들이 연애하는 얘기' 플러스 '재벌 나오는 얘기' 플러스 '두 쌍의 연애가 동시에 진행되는 얘기'=그냥 전형적인 공중파 로맨스 드라마 같은데 거참.

기선겸과 오미주는 서로를 좋아하지만 사랑한다는 말보다는 미안하다는 말을 훨씬 많이 한다. 사랑한다는 대사는 맨 마지막 회에서야 겨우 나온다(끝까지 안나오는 줄 알았음). 중간중간 반말을 섞긴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존대를 하고, 서로를 상처입히려는 말을 별로 하지 않는다. 소리소리 지르며 싸우지도 않고 자신의 감정을 폭력적으로 던져놓는 말이나 일방적인 비난이나 비꼬는 말이나 빈정거리는 말 같은 걸 주고받는 대신 자신이 상대의 말을 잘 이해했는지 숨김 없이 질문하고 잘못을 진솔하게 사과하는 관계라니, 이 얼마나 무해한가.

 

가까운 사이가 된 후에도 예의를 지키고, 자신의 속마음을 말하고, 상대의 말을 열심히 듣는다. 스킨십을 하기 전에는 상대의 의사를 먼저 묻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기선겸씨' '오미주씨'라고 말하지, '오빠'나 '자기' 같은 호칭을 쓰지 않는다. 선겸이 미주와 함께 사는 매이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동거인'이라는 호칭을 쓰는 것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심지어 미주네 집에서 지낼 때도 친절하지만 질척대지 않는다. '우연한 기회로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의 집에 얹혀 사는 장면이 나오는 보통의 한국 드라마'라면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의 동거인에게 누나누나 하며 엉겨붙거나 친한척하거나 예의없게 굴거나 할 것 같은데 그런 장면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내가 너무 옛날 주말드라마 같은 걸 생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이 바로 그 "내가 사랑한다고 말한 적 있던가요?" 장면. 사진만 봐도 청량함이 터져나옴...........ㅠㅠㅠㅠㅠㅠㅠㅠ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선겸과 미주를 '형'과 '누나'라고 부르지만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형'이나 '누나'라는 호칭을 붙이지 않는다. 영화가 단아를 누나누나 하면서 따라다니지도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표님이라고 부른다. 단아에게 누나라고 부르는 사람은, 단아의 '동생'인 서태웅뿐이다. 아무한테나 '언니/오빠/형/누나'라는 호칭을 갖다붙이면서 인간 관계를 가족화하는 한국인 종특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내게는 이 부분이 참 좋았다. 저렇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진짜로 저렇게 부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사람, 그러니까 (이상적인) '가족' 같은 사람이나 혈연과 상관 없이 '가족'인 사람이어야지. (오빠라고 불러! 라는 말 들으면 소화불량이 생기는 사람=나)

 

찰진 대사들도 많았다. 보면서 옛날옛적 인정옥작가님 드라마를 보고 있는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초반의 단아와 영화의 대화 부분은 좀 따라가기 어렵기도 했는데(그래서 처음엔 1회 보다 한번 쉬고, 1회 다시 보고, 끊고 2회 보다 한번 쉬고 하느라 이러다 끝까지 못 볼 수도 있겠군 싶었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두 캐릭터에 적응되고 나니까 속도가 붙었다. 정지현실장님이 매이언니를 보고 한눈에 반했을 때 "아, 가장 먼저 이 질문이 선행됐어야 했죠… 연애 상대에 남성이 포함되어 있습니까?"라고 질문하는 장면은 진짜 놀라움 그 자체😲😲 세상에 내가 한국 드라마에서 이런 장면을 다 보다니😲😲😲😲 라는 생각을 런온 보면서 여러 번 했는데 이 장면에서 그 생각이 진짜 많이 들었다. (매이언니가 자신이 무성애자라고 말하는 부분 볼 때가 맨 처음 그 생각이 들었던 순간이었음. 아니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아????? 하는 기분이었다😲😲😲😲😲😲)

 

이 드라마에서 다루는 이슈/인물/소재의 다양성도 맘에 들었던 점. '겉은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은 엉망진창인 가족' 이야기(선겸이네/ 단아네)부터 운동계 폭력 문제, '내부고발자'에 대한 배제, '부모 없는 아이들'에 대한 시선,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는 것에 대한 문제, 보호종료아동, 여성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착취, 싱글맘, 운동하는 여자, 동성애자와 무성애자, 자아 없이 살아온 인물,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는 인물, 인종 차별, 콘텐츠 제작 현장의 열악함, 번역이라는 작업의 의미, 엄마의 삶, 일하는 여자 얘기, '이중잣대', '분리수거', '선 긋기', 의사소통의 문제, 커밍아웃과 아웃팅,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진심을 제대로 전달한다는 것, 인간과 인간이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 인간이 자신을 알아간다는 것,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돌보는 것의 의미…등등등.

 

특히나 이 장면이 얼마나 인상적이던지. 처음 봤을 때도 뭔가가 가슴에서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었는데, 마지막 회까지 다 보고 나서 산책나간 길에서 자꾸 이 장면이 떠올라 울컥울컥했다. 

 

14회 마지막, 달리기 완주를 마친 미주와 미주를 기다린 선겸이 만나는 장면에서 
십대의 선겸과
십대의 미주가
상처받아 아프고, 피해서 도망가고 싶었을 그때의 미주와 선겸이, 그 시간들을 잘 살아내서
시간이 흐른 뒤 만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장면 같았달까. 둘다 너무 잘 살았다, 잘 살아냈다, 잘해냈다 싶었다.

 

그래서 사실 이 드라마는 현실보다는 판타지 같다. 이렇게까지 예의바르고 무해하고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똑바로 보려고 애쓰는 인물들을 일상 속에서 만나기란 쉽지 않으니까. 우선 나부터 이런 인간과 거리가 멀고ㅠㅠ 심지어 선겸이는 아침형 인간인데다가 요리도 살림도 일도 엄청 열심히 함. 미주는 선겸을 좋아하면서 달리기를 하는 아침형 인간으로 스스로를 바꿔내고. 제가 평생을 아침형 아닌 인간으로 살아왔는데ㅠㅠ 그거 진짜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어려운 일이란 말입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리하여 이렇게 수많은 갈등이 해결되었습니다' 식의 마지막회야말로 어찌 보면 그 판타지의 절정이고.

 

특히 이 장면 말이죠. 런온의 최강 빌런(이라고 쓰면서 생각해보니 박규덕이 더 빌런 같기도 하고...) 기정도씨까지 기꺼이 끼워주는, 이 자애로운 결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해한 사람들을 보는 게 즐겁고 찰진 대사들을 듣는 게 신나고 '서로 다른' 이들이 각자의 삶을 공유하며 '함께 살아가는' 장면들이 너무너무 청량해서, 하 그래 이것이 21세기 드라마지😭😭😭😭는 기분으로 16회까지 정주행할 수 있었다. 옷소매프렌즈언빌리버블이나 지옥을 보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이렇게 청량한 판타지로 마음을 가볍게 할 필요도 있는 것 같다. 정신건강에도 좋고 마음도 덜 힘들고.

 

대사 중심으로 2회차 또 달릴 생각. 새파란 겨울 하늘처럼 맑고 쨍한 런온의 세계를 아직 경험하지 못한 세상사람들 모두 런온 보고 영혼 정화합시다🌈 기선겸씨 오미주씨 곧 다시 만나요🤗 육배우님과 기프로님과 예찬학생과 서대표님과 매이언니(나의 픽들)도 곧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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