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다시 한달을 가서

그냥 한번 써보는, '김연수소설가님 덕질의 순간들' (1)

지난주에 김연수라디오 첫회를 듣다가 소설가님께서 '독자들이 소설가님의 책을 함께 읽으며 김연수소설가님에 얽힌 경험들을 나누는 걸 보셨다'고 말씀하시는 걸 들으면서, 문득 나는 김연수소설가님을 어떻게 좋아하게 됐는가에 대해 좀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북극서점 강연 때도 이런 생각이 불현듯 들었고. 그러고 보면 나 역시 김연수소설가님의 책을 20년 가까이 읽어오고 있으니 이런 걸 한번 써 보고 싶을 때도 됐지...라는 생각으로, 의식의 흐름에 따라 써 보자면......



대학 시절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공간이 몇 개 있는데. 그 중 하나가 (90% 학생들에게 그러할 것으로 예상되듯이) 중앙도서관이다. 도서관처럼 모두가 공유하고 공존하는 공간에서 공부하기를 매우 어려워하는 내게 중도는 수업을 째고 책을 뒤적이다가(이것을 '브라우징'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걸 지난번 소설가님의 북극서점 강연 때 처음 알았다) 자는 곳이었다. 책을 읽다보면 저절로 잠이 왔다. 그래서 보통은 책이 가득 꽂힌 서가를 헤매고 다니다가 눈에 띄는 책들을 있는 대로 뽑아와 책상 위에 쌓아 놓고 그 위에서 잤다. 때로는 창가의 커튼 뒤쪽으로 가서 내 존재를 가린 후 잤다.

'BOOK BROWSING' 검색했더니 이런 이미지들이 나왔다. 나같네......

이상하게 그때 나는 보통의 학우들(!)이 공부를 하는 공간에만 가면 잠이 왔다. 원래 잠이 많기도 하지만 정말 무슨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졸음이 쏟아졌다ㅋㅋㅋㅋㅋ 수업 시간의 강의실, 수업이 없는 강의실, 중앙도서관, 법학도서관, 대예배실, 논지당(이라고 여학생 전용 도서관이 있었다) 등등...부지런히 하는 것도 딱히 없고 게으르기 짝이 없으며 공부는 하기 싫고 학교도 싫고 만사(에서 야구-영화-음악 빼고)가 귀찮았던 20대의 내가 그나마 질려하거나 지쳐하지 않고 했던 게 책을 보고 읽는 것이었다. 학교 근처에 이런저런 헌책방이 많았어서 자주 다녔고, 이런저런 책들을 주워왔다(고 쓰지만 사실은 사왔닼ㅋㅋㅋ).

가장 큰 책의 보고는 학교 도서관이었으므로 그곳에 있는 책을 탐욕스럽게 읽어치우는 건 가장 하기 쉬운 일이었다. 문학에 대한 조예도 없었고 취향이랄 것도 없었다. 중학생 때부터 읽은 세계문학전집에서 그만 나와야겠다는 생각과 고등학생 때부터 열심히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전체 작품들을 본격적으로 다시 읽어보자는 생각만 있었다(그래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부터 모든 에세이와 소설을 다시 읽었다. 대체 왴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별 의미도 찾지 않고, 뚜렷한 목표도 세우지 않은 채, 닥치는 대로, 막무가내로 읽던 내게 가장 만만했던 건 온갖 추리소설과 탐정소설, 일본 소설, 한국의 현대소설이었다.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양귀자 공지영 신경숙 은희경 전경린 한강 윤성희 정이현 천운영 등 여성작가들의 소설을 주로 읽게 됐다. 가장 매력적이었던 작가는 역시 배수아선생님ㅠㅠ이었다. 바람인형이 가장 좋았고, 나는 이제 네가 지겨워의 쿨함과 동물원 킨트이바나의 이국적인 느낌도 너무 좋았다. 정말 20대 초반에는 배수아작가님의 복제 불가능한 감성과 표현에 넋이 나가 있었던 듯...(정말임) (이렇게 많이 주절거렸는데도 김연수소설가님에 대한 얘기는 아직 안나옴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책들 집에 다 있고 바람인형과 이바나도 당연히 있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의 새 표지는 별로라고 생각함;


그렇게 도서관 서가 주변을 서성이던 어느 날, 우연히 꾿빠이 이상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이상의 데드마스크를 누군가 발견했다면? 이라는 상상력이 흥미로웠다. 당시의 내게 이상이 매우 흥미로운 존재이기도 했고(미친 소설같은 날개와 미친 시 같은 오감도를 쓴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이냔 말이다). 당연한 얘기 같은 거울보다 충격적인 이미지를 그린 가정을 좋아했던 내게 이상은 현실이라기보다는 허구 또는 신비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래서 잔뜩 흥미를 품고 그 책을 빌렸는데

아니 너무 놀랍게도 뭔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는 거닼ㅋㅋㅋㅋ 나름 국문과 지망생이었으므로(학부로 입학함) 잘 읽어야만 할 것 같은 책임감과 의무감이 드는데 너무 어려웤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ㅠㅠ 그래서 읽어야지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 마음 속에 돌 달아놓은 듯 생각만 하고 있다가 결국 연체해버렸고 벌금도 왕창 냈닼ㅋㅋㅋㅋ 아 역시 나한테 이렇게 진지한 책은 무리야...사람 죽이고 물건 훔치는 얘기나 신나게 읽어야겠어...하면서 한동안 그 책을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국문과에 가서 이경훈교수님의 수업을 듣게 됐다. 식민지 시절 한국 근대 문학에 나타난 근대의식, 탈식민 또는 '지구적 보편성'을 지닌 '세계인'에 대한 희구와 열망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이었는데, 굉장히 재미있었다. 내용이 쉽지도 않았고 성적도 그저 그랬지만 교수님 수업을 다시 한 번 들어보고 싶어서 3학년 때 신청한 게 이상소설강독이었다. 첫날 교수님이 이상이 쓴 모든 소설을 발표 당시의 원고대로 읽을 거라며 취소할 사람들은 빨리 하라고 웃으셨던 게 지금도 생각난닼ㅋㅋㅋㅋㅋㅋㅋㅋ 나는 이 수업이 매우 재미있었고 피상적으로 알던 이상에 대해 조금이나마 제대로 알게 된 느낌이 들어(사실은 그나마 피상적으로 알던 이상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아진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보람이 있다는 기분까지도 느껴졌다.

두 권 다 사서 재미있게 읽었었다. 오랜만에 찾아봤더니 교수님 한참 전에 퇴임하셨네 아이고...감사했습니다 이경훈교수님. 교수님 수업 재미있었어요.


이후 이상 전집도 사서 방의 책꽂이에 꽂아놓았고(자주 보진 않았다는 점에서 김수영 전집과 마찬가지다ㅋㅋㅋㅋㅋ ㅠㅠ) 이상에 대한 다른 작가들의 책도 간간이 찾아 읽어봤다. 그렇게 한동안 시간이 흐르고 대학원생 플러스 취준생 생활을 함께 하며 나날이 피폐해지기는 커녕 공부보다는 메이저리그 중계 보는 것과 이승열씨 따라다니는 걸 백만배 열심히 하고 있던 중, 도서관에서 꾿빠이 이상과 수년 만에 조우하였다!!!!!!!!!!!!!!! 이제는 읽을 수 있을 것 같아...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다시 책을 빌렸는데, 세상에 이 책이 너무너무 재미있는 것이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책을 다 읽고 이건 사야겠다고 결심했는데 검색해보니 절판됐다고 하여 안되겠다 그렇다면 한자한자 타이핑해야겠어...하고 마음먹었을 정도. 과거의 내가 이 책을 제대로 못 읽었던 건 내가 너무 무식했기 때문이구나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를 절실히 느끼며, 이렇게 재미있는 책을 쓰는 작가의 작품이라면 전작을 읽어 보고 싶은걸???? 하고 있었단 말이다. 그런데 그때

왼쪽이 오리지날 꾿빠이 이상. 오른쪽은 2016년에 나온 개정판. 개정판이 나오기 전의 오리지널 버전은 보기도 힘들었었는데 개정판이 나오고 나니 중고서점에서 오리지널 버전을 종종 볼 수 있게 돼 아이러니하다는 기분이 들곤 헀었다🙄 나는 오른쪽 버전만 가지고 있다🤔


김연수소설가님의 신작이 나왔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 민트색 표지 위에 흰 글씨로 제목이 쓰여 있는 디자인이 마음에 들기도 했고, 당시 친하게 지냈던 언니가 아주 재미있는 책이라며 강력히 추천해주기도 해서, 고민 없이 봤다. 앞부분은 그냥 무난하다는 느낌이었지만(그때부터 이미 이성애 로맨스 별로...인 취향이었구만 나새끼...) 뒷쪽 내용이 굉장히 충격적이었고 재미있었다. 연애 이야기를 쓰면서도 이것이 사회/세계와 얽혀 있는 지점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는 게 인상 깊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예전부터 한 개인의 안온한 삶이 사회/국가/제도/세계/구조에 의해 어떻게 파괴될 수 있으며 그렇게 파괴된 삶은 어떻게 회복/치유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이것 역시 오래된 관심이었다는 걸 지금 깨달음😲) 이런 점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와도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10대부터 20대까지를 하루키 kid로 보낸 내게 이 지점은 굉장히 인상적이고 매력적인 것이었다. ('하루키의 카버'를 한국에서 번역한 사람이 김연수소설가님이었다는 사실 역시 이 지점을 돋보이게 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대성당. 이 두 버전 모두 있다.대성당 개정판 버전도 물론 있다ㅋㅋㅋㅋ 나같은 사람 148713467명 있을 것...


흥미를 느낀 나는 서가에 꽂혀 있는 소설가님의 책을 하나씩 빌려 읽기 시작했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도 좋았지만 나는 유령작가입니다가 진짜 충격적으로 좋았다. 뿌넝숴를 읽고 엄청 충격받았는데 거짓된 마음의 역사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 이어져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음. 그래서 이 책을 읽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읽고 좀 쉬고 읽고 좀 쉬어야 충격이 가셨기 때문. 청춘의 문장들을 읽고는 아, 이 책을 스무살 때 읽었어야 했는데ㅠㅠㅠㅠㅠㅠ 하며 땅을 쳤다. 그러다 보니 2008년이 됐고, 여행할 권리를 재미있게 읽고 났더니 밤은 노래한다가 나왔다.

그리고 그 이후로 김연수소설가님은 배수아작가님을 대신해 내마음속 원픽이 되셨고, 나는 김연수작가님이라는 호칭 대신 '연모하는 김연수소설가님'이라는 호칭을 고수하게 되었다. 그만큼 그분의 소설이 내게 의미 있었기 때문이고, 밤은 노래한다를 너무 인상 깊게 읽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현재까지 변함없으니 음...14년째인가......지금도 김연수소설가님의 장편소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밤은 노래한다이다. (순위가 고정되어 있진 않지만, 지금은 밤은 노래한다-일곱 해의 마지막-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차례인 듯)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소설가님의 사인을 받은 책도, 바로 밤은 노래한다.

소설가님의 책 중 최고의 표지는 바로 이 왼쪽, '밤은 노래한다'의 '빨간책' 버전이라고 생각한다. 김해연이라는 이름을 '김해경'과 '김연수'에서 따왔다는 사실은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아릿해진다ㅠㅠ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