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19. 01:17ㆍ✒/다시 한달을 가서
예스24의 '채널예스'에서 김연수소설가님이 '문음친교 프로젝트'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연재하셨었다. 책 한 권과 그에 어울리는 혹은 짝지울 수 있는 음악을 함께 소개해주시는 칼럼이었는데, 많은 책을 읽으시고 다양한 음악을 들으시는 김연수소설가님답게+_+ 아직 읽어보지 못한 책들이 대부분이었고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음악가 이름이 대부분이었다.
예스24를 자주 이용하지 않다보니 솔직히 칼럼을 제때 꼬박꼬박 읽지 못했고 댓글 한 번도 달지 못해서ㅠ 막상 칼럼이 끝나고 나니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래서 그동안 소개해주셨던 책과 음악을 좀 리스트업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래서 책과 음악 목록을 기록해 두고, 글에서 인상 깊었던 구절도 함께 옮겨와본다.
1. 『처녀들, 자살하다』와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노래’ (2007.11.22.)
-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데뷔작 『처녀들, 자살하다』의 내용은 리즈번 가의 다섯 자매들이 어떻게, 또 왜 자살해야만 했는가를 회상한다.
- 몇 년 전 린하이는 중국 남부의 수상도시 주장을 방문했다가 비파라는 악기를 발견하고, 그 소리에 푹 빠져 <비파 이미지>라는 앨범을 발표했다. 그 앨범의 세 번째 곡은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노래’다.
- 괴기하고도 끔찍한 일을 다루는 이 소설의 목소리가 이 곡처럼 경쾌하고도 즐겁기만 한 까닭은 역시 ‘우리’가 고통과 눈물의 시기를 거치지만, 한편으로는 사랑도 하고 즐겁기도 한 평범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리라.
2. 유디트 헤르만의 『여름별장, 그 후』와 킹즈 오브 컨비니언스의 「Summer on The Westhill」 (2007.12.6.)
- 유디트 헤르만의 소설집 『여름별장, 그 후』에 실린 이 표제작은 슈타인과 함께 베를린 교외에 있는 그 집을 보고 온 과정을 한 여자의 시점으로 서술한다.
- 노르웨이 항구도시 베르겐에서 온 포크 듀오 킹즈 오브 컨비니언스의 데뷔음반 <Quiet is the New Loud>에 수록된 10번 트랙 ‘Summer on The Westhill’은 스쳐 지나가는 젊음의 한때를 노래한 곡이다.
- ‘Summer on The Westhill’은 여름이 끝났음을 알리는 노래다. 포도주를 들이켜다가 이따금 서로 바라보며 빙그레 웃는 게 전부였던 여름별장의 시절이 끝나고, ‘그 후’의 일들이 시작된다는 이야기. 결코 ‘와’라고 쓰지 못하고 ‘네가 온다면’ 담쟁이덩굴을 자를 테고, ‘네가 온다면’ 포도주를 마실 것이고, 이런 식으로 엽서를 쓰는 ‘그 후’의 일들. 하지만 그럼에도 ‘네가 온다면’, 네가 와서 서로 빙그레 웃을 수 있다면, 그게 전부야. 여름은 끝나겠지만, 그리고 집은 허물어지겠지만, 그럼에도 ‘네가 온다면.’ 그게 다야.
3.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와 호드리구 레아웅의 <Alma Mater> (2007.12.20.)
-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가 일단 제네바로 가겠다고 결심한 까닭은 빗속에서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그 여인은 다리 난간에 기대 편지를 읽다가 분노를 못 이겨 그 편지를 던져버린다. 그리곤 난간 위로 솟구치는 듯해 그레고리우스는 우산과 책을 집어던지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 이 책은 그런 식으로 구성됐다. 하나는 질문의 이야기, 다른 하나는 여행의 이야기. 결국 그 두 이야기는 같은 이야기다. 소설 속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언어의 연금술사』를 조금씩 번역하는 동시에 그 책을 쓴 의사 프라두의 삶을 뒤쫓는다. 『언어의 연금술사』에는 위에 인용한 문장과 같은 철학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이 가득하다. 소설이 끝나갈 무렵 『언어의 연금술사』는 모두 번역될 텐데, 그때쯤이면 타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게 얼마나 감동스러운 것인지 독자들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레아웅의 앨범 <Alma Mater>에 수록된 ‘A Tragedia’와 ‘Espelhos’는 이 두 개의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 인생과 마찬가지로 이야기는 고통에 가득 찬, 하지만 결국 빛을 보게 될 여행이다.
4. 미셸 우엘벡의 『어느 섬의 가능성』과 시규어 로스의 <Hvarf/Heim> (2008.1.3.)
- 세상에는 두 부류의 소설 애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프랑스 소설가 미셸 우엘벡의 소설을 끝까지 읽는 사람들과 읽다가 집어던지는 사람들.
- 나는 고통이란 풍경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윌리엄 터너의 풍경화가 있다. 그 풍경화 속에는 달도 있고, 빛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까지 포함해서 풍경화는 어떤 어두운 정서를 만들어낸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실낱같은 희망의 느낌이 존재한다고 해서 전체적인 고통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고통은 그것까지도 포함한다.
- 우엘벡의 소설을 끝까지 읽어야만 하는 이유는 시규어 로스의 음반을 끝까지 들어야만 하는 이유와 마찬가지다. 다 읽고, 또 다 듣고 나면 그제서야 이 책과 음반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된다.
5.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와 뮤의 「The Zookeeper's Boy」 (2008.1.24.)
-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는 말 그대로 끝까지 가보는 소설이다.
- 덴마크에서 온 밴드 뮤(Mew)의 노래에는 그로테스크한 아름다움이 부유한다. 연주는 포효하는데, 보컬은 지상에서 몇 미터 살짝 떠다니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로 어울리지 않아야만 할 텐데, 어쩐지 그들의 음악은 지구가 생겨났을 때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늑대처럼, 여우처럼, 기린이나 타조처럼. 그들이 도대체 어떤 세계를 노래하는지 알고 싶다면 <And The Glass Handed Kites>를 플레이어에 걸어놓고 처음부터 일곱 번째 트랙까지 쉬지 말고 쭉 듣기를 바란다.(어차피 한 번 틀기 시작하면 쭉 듣게 될 것이다.)
6. 마커스 주삭의 『책도둑』과 두 번째 달의 <Alice in Neverland> (2008.2.21.)
- 우리가 어떻게 죽는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까? ‘두 번째 달 monologue project’의 <Alice In Neverland>의 7번 트랙 ‘신수동 우리집’의 아코디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알 수 있다고.
- 다음은 리젤 메밍거가 1943년에 매일 밤 지하실에서 쓴 책 『책도둑』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이 구절들을 읽기 전에 음악을 10번 트랙 ‘나비의 집’으로 바꾸자. 이번에는 반도네온 선율이다. 아코디언과 반도네온은 사촌 사이지만, 반도네온의 눈빛이 더 우울하다. 반도네온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먼저 42페이지: 오늘밤에는 아빠가 나와 함께 앉아 있었다. 아코디언을 가지고 내려와 막스가 앉곤 하던 자리 가까운 곳에 앉았다. 나는 아빠가 연주할 때면 손가락과 얼굴을 자주 본다. 아코디언은 숨을 쉰다. 뺨에는 주름이 있다. 주름은 잡아당겨놓은 것 같다. 웬일인지 그 주름을 보면 울고 싶어진다. 슬프거나 자랑스러워서 그런 건 아니다. 그냥 주름이 움직이고 바뀌는 모습이 좋다. 가끔 아빠가 아코디언 같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아빠가 나를 보고 웃고 숨을 쉬면 음악 소리가 들린다.
7.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과 데빌 돌의 <The Sacrilege of Fatal Arms> (2008.3.20.)
- 순서대로 『비밀노트』 『타인의 증거』 『50년간의 고독』. 한국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부인하는 이 세 권의 소설이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작가의 이름은 아고타 크리스토프다.
- 그러니까 축축하고 끈적끈적한 뭔가가 목덜미쯤에 달라붙어서 서서히 내 몸 속으로 파고드는 듯한 느낌. 한없이 우울하게 아래로 가라앉는 듯한 느낌. 그건 ‘데빌 돌(Devil Doll)’의 <The Sacrilege of Fatal Arms>라는 음반이었다.
- 살아가다보면 위로의 말을 건네야만 할 순간들이 끊임없이 찾아온다. 자신에게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든. 하지만 막상 그 순간이 되면 그 어떤 말들도 위로의 말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따뜻하고 아름답고 정연한 말들은 그런 순간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이 우리가 꾸게 되는 악몽들에게 위로받는다는 걸 알게 된다. 그렇다면 그 말들의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태양, 바람, 밤, 달, 별, 구름, 눈, 비, 경이로운 그 모든 것들의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8.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와 모노의 <You Are There> (2008.4.10.)
- 때로 사랑은 전쟁만큼이나 잔인하기도 하다. 우리가 함께 보았던 것, 나 자신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라고 자신의 입으로 말했던 것, 우리가 죽고 난 뒤에도 거기 남아 영원하리라 믿었던 것, 우리의 전부였던 것들이 환영이라고, 지나가는 악몽이라고 다시 우리의 입술로 말하게 만든다. 때로 사랑이라는 것은. 이 자명한 사실로부터 시작해 『바람의 그림자』는 50여 년에 걸친 한 사랑의 역사를, 그리고 그 사랑의 끝난 뒤에 우리가 어떤 식으로 살아남는지를 보여준다.
- 일본의 4인조 밴드 모노의 앨범 <You Are There>의 세 번째 트랙 ‘Yearning’은 고통에 찬 열망이 얼마나 매혹적이고 환상적인 것인지 잘 보여주는 곡이다.
9. 니콜 크라우스의 『사랑의 역사』와 베이루트의 「Nantes」 (2008.4.25.)
- 어느 날 갑자기 한 사람이 이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하는 단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찾아오면. 그때가 되면 이전까지 우리가 다 배워서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완전히 새롭게 다가오게 된다. 미국의 소설가 니콜 크라우스가 『사랑의 역사』에서 이렇게 쓴 것처럼.
- 베이루트의 노래를 들으면 누구라도 그러하겠지만, 도무지 스무 살이 이런 노래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불가사의하게 느껴진다. 이런 목소리는 한 소녀를 평생 사랑하겠다고 맹세한 뒤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살아온 노인 레오폴드 거스키에게나 어울리는 게 아닐까? 베이루트의 데뷔앨범인 <Gulag Orkestra>에 실렸던 ‘Postcards from Italy’는 젊은이와 노인의 목소리가 서로 혼재하면서 빚어내는, 놀라운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 서로 그 존재를 알지 못하고 살아왔던 한 소녀와 노인이 『사랑의 역사』라는 책을 매개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만약 그렇게 연결될 수 있다면, 서로 소통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기적이라는 사실을 이 소설은 보여준다.
10. 코맥 매카시의 『로드』와 라흐마니노프의 「엘레지」 (2008.6.26.)
- 코맥 매카시. 『로드』. 길. 이 소설에 대해서 말하는 건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라흐마니노프. 미샤 마이스키와 세르지오 티엠포가 연주한 엘레지. 첼로와 피아노로 들려주는 비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 사라지리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노래. 그러므로 엘레지는 진실의 노래. 지금의 세상은 모르는 것들을 위한.
- 착해져도 괜찮아. 상상하면 되는 거야. 네가 상상하는 대로 세상은 만들어질 거야. 우리가 연습할 것은 위악이 아니라 선이야. 착해져야만 해. 좋은 사람이 되어야만 해. 그건 전혀 나약하지도 않고, 연약하지도 않아. 우리는 적어도 한 사람에게는 착한 사람이, 또 좋은 사람이 될 거잖아. 그것도 늘 그럴 거잖아. 그리고 착한 사람들과 좋은 사람들은 늘 꿈을 꾸게 마련이잖아. 바로 그 꿈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구원할 거야.
11. 아이뜨마또프의 『백년보다 긴 하루』와 우르나의 「상지도르지」 (2008.9.25.)
- 사막에 가면 누구나 별에 대해서 얘기할 수밖에 없다. 친기즈 아이뜨마또프의 『백년보다 긴 하루』 역시 별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살고 있는 별. 이 별은 스텝 한가운데에 외따로 떨어진 간이역 보란리-부란니 역처럼 고독한 별이다.
- 우르나. 내몽골 서남부의 오르도스에 온, 소녀의 얼굴을 하고 노파의 목소리를 내는 신비로운 여자. 그녀가 2002년에 출반한 <Hodood>, 즉 ‘초원에서’에는 초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노래가 담겼다. 그녀의 노래는 마치 육체는 존재하지 않는 목소리처럼 들린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거기 분명히 바람의 소리는 들리는 것처럼.
- 우리는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이따금 자유로워진다. (...) 가끔 우리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자신의 삶을 살아갈 때.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속인 삶을 한 번 더 속일 때. 그리고 그걸 사랑이나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끝끝내 소망할 때.다음은 리젤 메밍거가 1943년에
12. 크리스토프 바타이유의 『다다를 수 없는 나라』와 릴리 크라우스의 <모차르트 소나타 전집> (2008.11.20.)
- 『다다를 수 없는 나라』에도 어떤 사람의 삶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뉴스들이 존재한다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 그 사람을 순수한 고독 속으로 이끄는 문장들이 등장한다.
- 피아니스트인 릴리 크라우스에게 가장 견딜 수 없는 일은 일본군들이 국기를 게양할 때마다 전축으로 틀어놓은 일본 국가를 듣는 일이었다. 수용소에서,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기본 조성도 없는, 양철을 두드리는 듯하며, 예측하지 못한, 어딘가 임의의 음에서 끝나는” 일본 국가를 들을 때마다 릴리 크라우스는 자신의 인생은 끝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365번 정도. 나는 그녀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릴리 크라우스 같은 피아니스트에게 들을 수 있는 음악이 군국주의 나라의 국가일 뿐일 때, 그녀는 죽었다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 모노로 녹음된 그녀의 모차르트 소나타곡을 듣고 있노라면 바느질 흔적도 보이지 않는 수수한 옷감이 떠오른다. 피아노 하나로만 연주된 곡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하나로만 연주됐기 때문에 그 선율은 따뜻하다.
13.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와 더 큐어의 「The Kiss」 (2009.4.16.)
-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쓴 『더 리더』는 내게 얼굴에 대한 소설로 기억된다.
- 사랑에 빠진 연인들을 생각하면 늘 영국 밴드 더 큐어(The Cure)의 노래 「Just Like Heaven」의 도입부가 생각난다. 드럼 소리는 심장이 뛰는 소리다.
- 우리는 개별적인 존재가 되자. 연인에게만 키스하자. 눈에 보이지 않는 걸 상상하자. 진부해지지 말자. 비록 슬퍼질 게 분명하다고 하더라도 그 얼굴이 아름답다고 말하자. 외로워지지 말자. 세상을 또렷하게 바라보자. 그게 두 번째 아우슈비츠를 막는 일이며 진부하기 짝이 없는 악을 저지르지 않는 방법이다. 안다. 이것도 물론 비약이다. 하지만 가끔은 비약하자. 그냥 과정을 생략하고 결론을 내리자.
14.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과 베가 4의 「Life Is Beautiful」 (2009.5.1.)
- 『자기 앞의 생』에는 죽어가는 순간까지 므슈 하밀과 마담 로자였던 두 사람, 그리고 열 살이었다가 하루 사이에 열네 살이 된 모모가 나오기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좋아한다.
-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대처 방식은 이렇게 누군가와 함께 한동안 시간을 보내는 일이다. 각자 혼자서 시간을 보내지 않고 서로 함께 한동안 시간을 보내게 되면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좀더 살 만한 공간으로 바뀐다. 우리뿐이라면 공간의 대단한 낭비라고 말했던 칼 세이건의 말을 조금 흉내내자면, 나 혼자라면 인생의 대단한 낭비다.
- 영국 그룹 ‘베가(Vega) 4’의 「인생은 아름다워(Life is beautiful)」는 들을 때마다 가슴을 뛰게 만드는 노래다.
- 누구에게나 생은 주어지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역으로 그 누구의 인생에 대해서도 그게 쓸모없는 삶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나면, 그 사람으로 인해 우리 삶은 어쩔 수 없이 아름답게 회상되니까. 이런 인생 그냥 죽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절망의 시간에도 그런 순간들은 멀리 있는 별들처럼 반짝이니까.
15.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와 라디오헤드의 「Kid A」 (2009.5.20.)
- 하루키의 오랜 팬에게 『해변의 카프카』는 거대한 놀이공원과 같다. 디즈니랜드에 가면 미키마우스가 있는 것처럼, 이 하루키 월드에는 고양이가 등장한다. 이게 만약 거대한 놀이공원 하루키 월드라면 이 소설을 사실의 세계로 받아들이는 일처럼 곤란한 건 없다. 사실의 세계는 어딘가 다른 곳에 있다.
- 「Kid A」 같은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건 정말 복된 일이다. 이 노래에는 내용도 없고 주제도 없고 따라서 교훈도 없으니까. 그저 우리의 삶이 얼마만큼 훼손됐는지만 보여줄 뿐이다.
-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어떻게 훼손됐는지 말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사랑했던 한 사람을 영원히 기억하는 것 역시 쉽지 않다. 『해변의 카프카』는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어떻게 훼손됐으며 사랑했던 한 사람을 어떤 식으로 영원히 기억하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쓴 기나긴 이야기인 동시에 그게 왜 불가능한지 말하는 소설이다.
16. 배수아의 「올빼미의 없음」과 오지은의 「푸름」 (2009.6.5.)
- 배수아의 「올빼미의 없음」(『문학동네』 2009년 여름호에 수록)은 바로 이 과정, 즉 우리의 애도는 왜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지 보여주는 소설이다. 이 개인적이고 격렬한 소설을 이해한다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이 소설은 자연을 향한 압도적인 분노이자 인생에 대한 가장 과격한 저항이다. 거기 사랑했던 사람이 죽고 나면, 그는 우리에게 부재하게 되지만, 또한 그는 그 부재로 우리에게 존재하리라. 그게 바로, 없음으로 존재한다는 의미다.
- 이 없음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함께 울어주는 일뿐이다. 그 눈물에는 아무런 논리도 이유도 의미도 없다. 그건 그냥 눈에서 솟구쳐 흘러내리는 물방울들일 뿐이다.
- 자전거를 타고 오월의 거리를 달려갈 때면 임의 재생으로 설정해놓은 아이팟에서는 록음악과 클래식과 뉴에이지와 헤비메탈이 두서없이 흘러나왔고, 때로 오지은의 이 노래 「푸름」이 흘러나왔다.
17.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과 Olafur Arnalds의 <Found Songs> (2009.7.6.)
-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은 9.11 여객기 테러로 아빠를 잃은 아홉 살 소년 오스카가 어느 날 꽃병 속에서 발견하게 된 봉투 속의 열쇠에 맞는 자물쇠를 찾아 6개월에 걸쳐서 뉴욕을 헤매는 이야기다.
- 아이슬란드 출신의 뮤지션 올라푸르 아르날드의 <Eulogy for Evolution>은 오랫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나 혼자서만 듣고 싶었던 음반이었다.
- 올라푸르 아르날드의 음악을 들으며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을 위로하는 건 지나간 시간의 역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들었던 음악을 듣고 또 듣고 난 뒤에야 비로소 어느 순간 위로받았다는 걸 알게 되는 것처럼 그 뒤의 기나긴 애도는 우리가 사랑했던 시절들이 거기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18. 줌파 라히리의 「헤마와 코쉭」과 로의 「I Started a Joke」 (2009.10.22.)
- 코타키나발루를 떠나기 전에 나는 『그저 좋은 사람』을 다 읽었다. 마지막 소설은 「헤마와 코쉭」이었다.
- 농담과도 같은 일들. 죽기 직전에야 바다가 보이는 그림 같은 집에서 살게 되는 일 같은 것들. 그게 어떤 식의 농담인지 궁금하다면, 로(Low)의 「I Started a Joke」를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 농담 같은 관계. 허약하기 짝이 없는.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관계. 이런 허약한 관계가 우리를 계속 살아가게 하는 까닭은 우리의 인생에는 지나고 난 뒤에야 그 의미가 분명해지는 일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리라.
19. W.G.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와 바흐의 <푸가의 기법> (2009.11.19.)
- 우주라는 곳은 참으로 아름답구나.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게 얼마나 겸손한 감정인지 다시 깨달았다. 그런 아름다움은 늘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이번에는 별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 대신에 한 작곡가가 죽기 직전에 만든 선율을 들었다. 에머슨 쿼텟이 연주한 <푸가의 기법>.
- 『아우스터리츠』는 임종의 순간에야 그 의미를 알게 되는 삶과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넌더리를 낼 정도로 재미없다고 말할 게 분명하며, 나 역시 지루함 속에서 읽은 이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뒤에야 나는 주인공 아우스터리츠가 회상한 그 모든 인생의 사건들이 그저 물처럼 흘러가기 때문에 중요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환영의 삶을 통해 영원을 경험하게 된다는 건 기이하게 느껴지겠지만, 새벽에 일어나 유성을 바라보거나 조용히 방에 앉아 <푸가의 기법>을 듣거나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우스터리츠』를 끝까지 다 읽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언급된 책 중 내가 읽은 것은 여덟 권. 한 권은 읽다가 포기했던 책(김연수소설가님 글에도 언급됐던 아우스터리츠...배수아작가님과 황정은작가님이 극찬하셔서 어떻게든 읽어보려고 했었는데 페이지가 너무 안넘어갔다ㅠㅠㅠㅠ).19권의 책들 중 제일 좋아하는 건 역시 니콜 크라우스의 사랑의 역사다. 심지어 사랑의 역사를 내가 너무 좋아하는 베이루트 음악과 함께 언급해주셔서ㅠㅠ 괜히 엄청 기뻤다. 베이루트 음악을 들을 때마다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지 하며 늘 감탄하기 때문에...어쨌든간. 김연수소설가님 장편소설 중 가장 좋아하는 책이 (현재까지는) 밤은 노래한다인데, 나는 그 책이 내가 읽은 사랑 이야기-연애소설 중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외국 소설 중 최고의 사랑 이야기는 누가 뭐래도 (역시 현재까지는) 사랑의 역사.
문득 사랑의 역사를 읽기 전이라면 뭘 꼽았을까 생각해봤는데, 음...폭풍의 언덕 아니면 부활이 아닐까 싶네. 한국 소설로는 잘 가라 서커스가 떠오른다. 부활 읽은 지 오래됐지만 정말 멋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부활 읽기 전까지는 죄와 벌을 아주 좋아했었는데 부활 읽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어버렸음. 폭풍의 언덕은 종종 다시 읽는다. 초등학생 때 맨 처음 읽었는데 그때는 뭐지 이 책-_- 같은 느낌이었다. 제인 에어가 훨씬 좋았지. 근데 중학생 때 다시 읽고, 고등학생 때 다시 읽고, 20대가 되어 또 다시 읽으면 읽을수록 책이 더 좋아졌다. 미친 사랑 이야기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책. 하지만 제인 에어 역시 여전히 좋다. 제인 에어는 미친 사랑보다는 지적인 사랑에 가깝다고 생각함.
파이 이야기,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더 리더,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해변의 카프카, 올빼미의 없음은 모두 흥미롭게 읽었거나 좋아하는 책이다. 저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책은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인 것 같고,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건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었던 것 같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읽는 내내 너무 충격적이어서 아고타 크리스토프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더 알고 싶어졌었다. (보통 나는 그러는 적이 없다)
아직 못 읽어본 책 중에서는 코맥 매카시의 로드부터 좀 읽어보고 싶다...이상하게 코맥 매카시 책을 한 권도 안 읽어봤다 거참나. 리스본행 야간열차와 백년보다 긴 하루도 찾아 읽어봐야겠고. 처녀들, 자살하다는 읽어볼까 말까 종종 생각하는데 제목이 영 마음에 안들어서 늘 읽지 않게 된다. 하지만 김연수소설가님이 맨 첫 번째로 꼽아주신 소설이니,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네. 소설가님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음악이라는 베가4의 '인생은 아름다워'도 꼭 들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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