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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달을 가서

221111 김연수소설가님 신작소설 낭독회 @아람누리도서관 (2)

지난번 후기에 이어지는 포스팅. 젖지 않고 물에 들어가는 법에 대한 얘기를 해주셨다는 말까지 썼으니 그 뒤의 이야기를 이어 써야 하지만 젖지 않고 물에 들어가는 법은 미발표작이므로 둘러둘러 쓰자면...

 

또 소설가님 사진으로 시작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소설과 관련해 김연수소설가님은 소설가님 글의 가장 주요한 테마라고 할 수 있을 법한,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도록 어려운 일인데 소설은 타인을 이해해야 쓸 수 있는 것이므로, 어떻게 보면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 따라서 소설쓰기는 실패가 예정된 글쓰기일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는 것>은 실패의 글쓰기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할 때 인간은 실패하는 동시에 변화하니까.

 

소설가님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깊은 밤, 기린의 말진주의 결말이 차례로 생각났다. 깊은 밤, 기린의 말은 자폐를 겪고 있는 아동 태호와 그 가족들이 등장하는 소설이다. 비장애인 성인 남성인 김연수소설가님이 태호와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타인'에 대해 아무리 많은 조사를 하고 공부를 하고 만남을 가져도, 그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고 그의 경험에 온전히 공감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태호의 가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가님은 태호의 이야기를 쓰셨고, 그 결과는 태호를 대상화하지도, 무작정 '불쌍하게 여기지도' 않는 소설로 이어졌다. 나는 이 소설을 너무 인상 깊게 읽었고, 나같은 사람이 세상엔 928379861명 있겠지.

 

온전히 이해하고 완벽히 공감하지 못하니 쓰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침묵과 방관과 무관심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사자가 아니라면 말하지 말라'는 태도는 타자화만큼이나 위험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당사자주의가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데 크게 동의하지만, 당사자의 외연을 확장해서 사고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도 여긴다. 내가 태호의 가족이 아니어도, 내가 태호가 아니어도, 사려 깊고 정성스럽게 태호의 이야기를 쓴다면, 살아 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진주의 결말에서 진주는 적극적으로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의 말을 한다. 나를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너'는 나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항변한다. '너'는 내가 C라는 결말에 도달한 이유를 B로 찾고, B에 도달한 이유를 A로 찾으면서, A와 B와 C로 이어지는 '논리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지만, 사람은 그렇게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한다. 인간은 어떤 이유 때문에 어떤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남들 보기에 그럴듯한 이야기로 설명되는 존재도 아니라는 거다. 이유 없이 어떤 행동을 할 수도 있는 거고, 과거가 반드시 현재에 대한 논리적 설명을 제공하지 않을 수도 있는 거라는 걸, 진주는 강조한다.

 

이런 진주의 말은 김연수소설가님이 플롯에 대해 말씀해주신 것과 상통한다. 소설이 '시간의 쓰기'라면, 소설의 세계는 '과거가 미래를 규정하는 세계'가 되는데, 이건 너무 갑갑한 세계라는 것이다. 어렸을 때의 경험이 이후의 삶을 결정해버린다면 인간은 계속 내가 하는 행위의 원인을 '어린 시절의 결핍/상처/고통' 따위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나의 미래는 그 결핍/상처/고통을 치유하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한 과정이 되거나, 결핍/상처/고통 속에서 체념하고 살아가는 것이 되거나, 그 결핍/상처/고통을 더 확장하고 심화해가며 몸부림치는;;;;;;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이건 뭐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에 나오는 삶 아닌가요ㅠㅠ 상상만 해도 너무 슬프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소설가님은 이를 '완벽하게 짜놓은 세계에 갇히는 것'이라고 표현하시면서, 세계는 인간이 전혀 뜻밖의 행동을 할 때 바뀌는 것이라고 하셨다. 마치 소설가님이 깊은 밤, 기린의 말을 쓰셨던 것처럼(은 소설가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라 내 생각ㅋㅋㅋㅋㅋㅋㅋㅋ)!!! 

 

인간이 뜻밖의 행동을 하게 되는 상황으로는 두 가지가 있는데, 우선 큰 외부적인 충격으로 과거와 상관 없이 현재가 바뀔 수도 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드셨던 예가 북한군이 쳐들어오는 것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뭐 엄마가 위암 4기라든가...라고 하셔서 아이고ㅠㅠ 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아 이거슨 소설가님의 경험담이구나 싶어서 슬퍼졌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저도 그랬으니까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근데 이런 일은 현실적으로 항상 생기는 게 아니니까, 일상적인 삶에서 '뜻밖의 행동을 하게 되는 경우'라면 논리에 벗어난 좋은 일을 하는 것,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논리적 과정에 따르면 내가 이 사람에게 잘해줄 하등의 이유가 없는데, 갑자기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잘해주는 것이 있다고 하셨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또 영상을 찍었지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소설가님의 귀한 말씀 백번천번 보고 싶어가지고...

 

 

 

그 뒤의 말씀은 다 너무 감동적이었으므로 굳이 받아 적어 놓는다. 이것도 내가 백번 천번 보려고...

 

플롯을 흐트러뜨려야 해요.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지금 현재를 살게 되면 그렇게 미래로 (똑같이) 살게 될 게 뻔하잖아요.
그냥 그런 삶인 거예요. 누구나 그럴 줄 알았어, 이렇게 되는 삶.
그런데 저는, 제가 읽었던 많은 소설들은 그런 내용이 아니었거든요.
모두가 갑자기 한순간 달라졌고, 마치 깨어나듯이 현실에서 깨어났고,
그러면서 다른 모습을 보이고 했기 때문에,
우리도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달라지는...그런 계기는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을 때, 가장 평화적으로 지금까지의 세상의 플롯을 깰 수 있는 방법은
다정함밖에 없는 것 같아요. 이유 없는 다정함.

 

 

10대 시절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이후의 p년 정도는 냉소로, 그 이후의 q년은 체념과 회의로, 그 이후의 r년은 슬픔과 분노에 기반한 비관에 기대어 살아온 나에게 희망과 미래 같은 건 너무 남의 일이다. (냉소는 거의 사라졌지만 슬픔과 분노의 빈도수와 크기는 점점 무한에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어릴 적엔 인간에 대한 신뢰에 기반한 메시지를 들을 때마다 '어이구 속도 좋네 저런 말이 나오고'라며 못되쳐먹게 굴었다.

 

지금도 여전히 내 성향의 기본은 슬픔과 분노에 기반한 비관이라고 여긴다. 이건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신뢰에 기반한 메시지를 말하는 사람들의 존재가 얼마나 고귀한지, 인간을 신뢰하고 인간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긍정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인지는 날이 갈수록 절실히 느끼고 있다.

 

인간을 싫어할 만한 이유를 찾는 건 쉬운 일이고, 인간을 보며 슬퍼하고 화를 내는 것이나 인간의 미래를 비관하는 것 역시 굉장히 쉬운 일이다. 이런 건 하나도 멋지지 않고 귀하지도 않다.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는, 생리적 반응처럼 당연한 일일 뿐이다. 그래서 아무 의미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싫은 인간들 속에서 희망을 찾고, 그들에게 어떤 기대를 갖고, 신뢰를 갖고, 가능성을 찾고, 그들의 미래를 낙관하며 긍정하는 건 죽도록 어려운 일이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거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그 불가능한 것들을 찾아내어 마음에 소중히 품는다. 그리고 그것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들인지 이야기한다. 싫은 인간들이 다 죽어 없어져버리기를 바라며 저주하고만 있지 말고, 그 인간들을 도움으로써 이 세계를 바꿔나가라고 한다.

 

너무 어려운 일이다. 할 수 없는 일에 가깝다. 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을 아주 어렵게 해내면 더 나빠질 수밖에 없는 세상이 놀랍게도 덜 나빠질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나아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치 소설가님이 하신 말씀처럼, 남을 도와주고 착하게 사는 것이 가장 평화적으로 지금의 세계를 바꾸는 것일 수 있겠지.

 

소설가님의 다정함이 매정한 내 마음속 빙판에 균열을 낸 것처럼...

 

여기까지 한참 쓰다가 갑자기 찾아보고 싶어져서 '친절'과 '다정'의 의미를 검색해봤더니, '친절'은 '대하는 태도가 정겹고 고분고분함', '다정'은 '정이 많거나 정분이 두터움'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고분고분하다'는 '말이나 행동이 부드럽고 공손하다'고, '정'은 '사랑이나 친근감을 느끼는 마음'이라고 하니 결국 '친절'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말 같고, '다정'은 인간의 마음에 대한 말 같다. 굳이 이걸 왜 찾아봤냐면, 나에게 '친절'은 가능태이지만 '다정'은 부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사랑을 느낀다니 세상에, 인간의 어디에 사랑할 만한 구석이 있어서...나 자신에게도 별로 없는데 하물며 불특정 타인에게????? 라고 질색하는 인간=나자신.

 

그러다보니 '너는 인간 빼고 다 좋아하는구나'라는 말을 들을 정도이지만 그들을 친절하게 대하는 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남이 나를 친절하게 대하든 말든 별 관심 없기 때문이다. 내가 친절한 게 중요하지 네가 친절하지 않은 건 뭐 디폴트니까 상관 없어 같은 심정이랄까. 그래서 다정하지 않으나 친절한 사람으로 긴 세월을 살아 왔으며 다정한 사람들과 관계맺는 것을 약간은 부담스러워했다. 그러나 지금은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갖고 타인의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이며 타인에게 따뜻한 손과 말을 건넬 줄 아는 다정함이야말로 거리두기와 기대 없음에서 비롯하는 친절함보다 훨씬 더 세계에 필요한 미덕이라는 걸, 자주 느낀다. 동시에 다정한 사람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들인지 점점 더 절실히 깨닫고 있다. 

 

그러니 이유 없는 다정함이라는 말이 나에게는 얼마나 경탄할 만한 것이겠는가. 타인을 '이유 있는 다정함'으로 대하는 것도 쉽지 않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있는데 이유 없이 다정하게 대함으로써 지금의 세계를 평화적으로 바꿀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한 말씀이냔 말이죠ㅠㅠㅠㅠㅠㅠㅠ 그래서 요즘에는 저 말씀을 정말 자주 생각한다.

 

하루종일 만나거나 접하는 타인 중 10% 정도만이 나에게 무해하고 30% 정도는 적당히 유해하지만 40% 정도는 거슬리고 20% 정도는 빡치게 한단 말이다? 논리적으로 따져봤을 때 내가 잘해줘야 하는 사람은 10% 정도인 것 같고 70% 정도는 잘해줘도 되지만 안그래도 되는 사람인 것 같고 나머지는 잘해줄 필요를 따질 것도 없는, 당연히 함부로 대해야 하는 사람인 것 같단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도움을 요청했을 때 돕는 것이나 인사할 때 친절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물론(이 정도는 지금까지도 어려움 없이 잘 해오던 것들이므로) 굳이 돕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지만 돕는 것에도 인색하지 말아야겠다고 아주 여러 번 생각한다. 저새키한테 내가 왜 웃어줘야 하지? 라면서 '그럴 듯한 이유'를 생각해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소설가님께서 말씀하신 '이유 없는 다정함'과 맥락상 맞는 얘기가 맞는지 쓰다보니까 좀 헷갈리긴 하지만............................(뭔가 굉장히 협소하게 이해하고 왜곡되게 표현했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나저나...남은 얘기가 더 있는데ㅠㅠㅠㅠㅠㅠㅠㅠㅠ 쓰잘데없이 내 얘기 늘어놓다 보니까 엄청 길어져버렸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하 나새끼 대체 왜이렇게 말이 많은 거임 진짜 도라버리겠네.............소설가님 사진 몇 장만 더 올려놓고 남은 얘기들은 또 이어서 써야지 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날 소설가님 착장은ㅠㅠ 보면 볼수록 더 마음에 든다 흑흑흑 모자도 너무 잘어울리시고 니트도 너무 예쁘시고 여기에 안찍혔지만 양말과 바지의 색깔도 너무 잘어울리셨음ㅠㅠㅠㅠㅠㅠㅠㅠ 패셔니스타이심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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