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데이즈(빔 벤더스 & 야쿠쇼 코지), 2024 (1)

2024. 7. 31. 13:22흔드는 바람/보고

씨네큐브에 왔다. 올해 보고 싶은 영화가 많았는데 볼 틈을 내지 못했다(고 쓰면서 비겁한 변명이라고 생각한다). 남들 다 본 파묘도 극장에서 보고 싶었고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도 보고 싶었다. 듄 파트 2도 보고 싶었고 챌린저스도 보고 싶었다. 인사이드 아웃 2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존 오브 인터레스트퍼펙트 데이즈가 진짜진짜 보고 싶었다. 주위에 영화를 추천해주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몇 분이 추천해주셨다. 영화를 보고 내 생각이 났다며 내가 꼭 봤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저기 나오는 쟤가 너 같아...'가 아니라 '네가 좋아할 영화 같아!'라는 말씀들이었어서 따뜻했다. 퍼펙트 데이즈는 아무도 추천해주지 않았지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목과 포스터를 본 순간 '아 이거 내 취향이네...'라는 느낌이 강하게 와서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었다. 게다가 주인공은 야쿠쇼 코지 아저씨. 최근에 본 영화 중에서는 단연 최고였던 큐어의 주인공인 그 아저씨. 어떻게 안 봐요.

 

둘다 장기상영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고 영화관 갈 날을 미루고 미루다가, 7월 중순을 넘어서면서 이러다가 못 보겠다는 위기감이 엄습하여 문화가 있는 날을 향유하기로 했다(바로 오늘). 휴가를 쓰고 아침 일찍 씨네큐브에 와서 조조로 퍼펙트 데이즈를 보았고, 이따 여섯시에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볼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퍼펙트 데이즈를 보고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기다리면서 자판을 두드리는 중.

 

 

씨네큐브2관의 맨 앞자리에 앉는 것은 나의 취향.

 

영화는 좋았다. 남자 감독이 그리는 중년 남성의 일상이니까 적당히 좋겠지 엄청 좋진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보기 시작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솔직히 말하면 히라야마상의 출근길을 배경으로 Pale Blue Eyes가 흐를 때, 아 나 이 영화 좋아하네, 좋아할 수밖에 없네, 하고 예감해버렸다. 무슨 이야기가 이어질지 하나도 몰랐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이런 색채에, 이런 온도에, 이런 소리에, 이런 표정에, 이런 음악이라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지인에게 이 영화를 보고 싶다고 했더니 '리뷰 제목이 '영화 내내 출퇴근만 반복'인데요?'라고 해서 한참 웃었었다. (오마이뉴스에 실린 리뷰였고 영화 보기 전에는 읽어보지 않았다. 내 안에서 이 영화가 다 소화되고 나면 읽어볼 생각이다.) 영화 내내 출퇴근만 반복한다니 얼마나 지루하고 뻔할까...하는 생각이 영화 보기 전에도 들지 않았고 영화를 다 본 지금도 들지 않는다. 히라야마상이 창밖의 빗자루질 소리에 맞춰 눈을 뜨는 매 순간마다 나는, 혹시라도 눈을 안 뜨면 어떡하지, 눈을 뜬 히라야마상이 출근하지 않기로 결심하면 어떡하지, 하고 긴장했기 때문이다. 히라야마상이 눈을 뜰 때마다 반가웠고, 치약을 짜고 칫솔질을 하고 화분에 물을 주고 작업복을 갈아입으면서 오늘의 출근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는 게 왠지 뭉클했다. 그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쌓이고 모인 것이 인간의 삶이라는 게 새삼 느껴졌다.

 

현관을 열고 나와 하늘을 바라보는 히라야마상이 상쾌해 보이든 피곤해 보이든, 출근하는 발걸음이 평소와 다름 없어 보이든 평소보다 무거워 보이든 상관 없었다. 시간의 흐름에 맞춰 자신의 하루를 차분히 살아나가는 그의 모습이 그려지는 매 순간이 좋았다. 히라야마상이 아침마다 집 앞 골목길에 쌓인 낙엽을 쓸어내는 아주머니의 빗자루 소리에 맞춰 '으음...'하고 낮게 소리 내는 장면들이 다 좋았고, 잠에 들기 전 책을 읽거나 책을 들고 꾸벅꾸벅 조는 장면들 역시 좋았다. 안경을 벗어, 자신이 정해놓은 그 위치에 놓고, 어제도 그제도 자신을 품어주었던 그 이불 속으로 들어간 뒤, 잠에 빠지는 장면들도 모두 좋았다. 히라야마상이 꿈에서 보는 장면들을 흐릿한 몽타주로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도 좋았다.

 

일하는 히라야마상을 보는 것도 좋았고, 하루를 마무리하며 단골 가게를 찾아 술 한 잔을 마시는 히라야마상을 보는 것도 물론 좋았다. 하지만 자신에게 편안한 곳에서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던 히라야마상을 보는 것이 훨씬 좋았다. 자신의 귀를 친구(!)에게 기꺼이 내주는 다카시를 보며 웃음 짓고, 아야와 패티 스미스의 노래를 듣고, 목욕탕과 사진 인화점과 헌책방(인지 서점인지 잘 모르겠다ㅠ)을 들르며 주인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술집 주인의 노랫소리에 지그시 눈을 감는 히라야마상에게서는 '점잖은 어른'의 모습이 보였고, 그 모습 역시 (당연히) 좋았지만, 그 '점잖은 어른'의 느낌이 덜한 아침과 밤의 히라야마상이 나는 더 좋았다. 자기 삶을 자기 속도대로 살아가는, 대단한 일을 한다고 으스대지도 않고 힘든 일을 한다고 징징대지도 않는, 남들 눈에는 다 같아 보일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하루하루 다른 그 시간을 조용히 받아들이고 그 시간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같았고, 그 사람의 모습이 지금 내 눈앞에서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눈물겨웠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평온한 삶 속에서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인물의 모습을 잔잔하게 그리는 영화'라고 요약할 수 있나. 누가 나한테 그렇게 묻는다면, 나는 절대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아래의 두 대사 때문에.

 

 

 

저 두 대사에 대한 얘기와 니코와의 만남, 그림자 밟기, 그리고 와 이거ㅠㅠ 정말 너무한다ㅠㅠㅠㅠ 너무 너무한다ㅠㅠㅠㅠㅠㅠㅠ 너무하지만 너무 최고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라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던 마지막 장면에 대한 포스팅은 다음에. 야쿠쇼 코지 선생 좋은 영화 찍어주셔서 감사합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