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브렐러 아카데미의 '시간 여행' 문제에 대하여. (2)

2024. 8. 13. 00:48흔드는 바람/보고

앞의 포스팅에서 이어지는 내용. 사실 앞쪽에서는 시즌 4에 대한 얘기보다 1-3에 대한 얘기를 더 한 것 같고, 이번엔 주로 시즌 4 이야기.

 

이렇게 맨 윗줄에 디에고 라일라 파이브 나란히 놓기 있어요 네??? 마지막줄에 클라우스 아버지 루서 나란히 놓은 것도 네??????



엄브렐러 아카데미의 ‘시간 여행’이 평행우주의 존재를 인정하는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 건 마지막 시즌의 마지막회에 나오는 ‘Max’s Delicatessen’ 장면, 즉 수많은 파이브들이 만나서 대화하는 장면을 보고 나서였다. 디에고와 치고받고 다투다(다시 또 쓰지만 정말 한심했다 둘다…) 지하철역으로 가버린 파이브는 우연히 자기와 똑같은 파이브를 발견하고 그를 따라간다. 도착한 곳은 ‘Max’s Delicatessen’이라는 식당. 그곳에는 수많은 파이브들이 모여 있다. 손님 파이브(는 매우 많고) 서빙하는 파이브 음식 만드는 파이브…

 

바로 여기. 저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 다 파이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신이 따라갔던 파이브 앞에 앉은 ‘파이브’는 자신이 아닌 파이브에게 지하철 시스템에 대해 잘 알겠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파이브’는 “지하철 시스템은 같은 시점의 대체 버전들이지?”라고 말한다. 그러자 또다른 파이브는 맞다고 하면서, 원래 타임라인은 하나고, 우리(수많은 파이브)는 대체 시간선에서 온 너(‘파이브’)라고 말한다. 즉, 수많은 파이브들이 존재하는 수많은 타임라인이 독립적으로 함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파이브‘가 존재하는 ’타임라인‘이 있고 그 이외의 파이브들은 원래의 타임라인을 대체하는 타임라인에서 원래의 파이브를 대체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지하철 시스템에 대해 또다른 파이브가 진짜 파이브(!)에게 알려주는 게 재미있는 부분.
물론 진짜 파이브는 이미 알고 있지만. 파이브는 뭐 귀신같으니까요.
여기서 '대체 시간선'이라는 말을 쓴다.


시간선, 즉 타임라인은 애초에 하나다. 여러 개의 타임라인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다. 세계에는 ‘원래의 타임라인’이 있는데, 파이브가 시간 이동을 할 때마다 시간선이 분화된다. 즉 산산조각난다. 각각의 시간선에는 각각의 파이브가 존재하는데(따라서 파이브가 아닌 인물들도 존재하겠지. 하지만 그들은 파이브처럼 ‘지하철 시스템’을 이용할 수 없는 것일테고...) 그 파이브들은 모두 독립된 존재로서 각자의 세계에서 ‘알아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원래의 파이브를 대신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엄브렐러 아카데미에서의 세계가 전제하는 시간선은 하나다. 하나여야 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수많은 대체 존재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세계에 문제를 일으킨다. 이 때문에 파이브들은 타임라인을 하나로 만들려고 했다. 그 노력의 일환이 커미션이었다. 커미션을 활용해 붕괴된 타임라인을 복구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원래 시간선은 하나여야 해'라고 할 때 1차로 가슴이 철렁했고요... (아니 그러면 지금이 잘못된 상황이라는 거잖아? 하고)

 


근데 시즌1에서 그랬듯이, 시즌2와 시즌3에서도 반복적으로 보여줬듯이, 엄브렐러 아카데미가 존재하는 이상 세계에는 종말이 찾아올 수밖에 없다. 어떤 이유로든. 엄브렐러 아카데미는 세계의 종말 앞에서 이를 막기 위해 애쓰는 존재들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하니까, 세상을 구하려고 계속해서 노력한다. 진짜 끝까지ㅠㅠ 뉴력한다ㅠㅠㅠ 하지만 그때마다 세계는 멸망한다. (145,412번이라고 ‘레인맨’ 파이브가 말해줬다 흑흑흑) 

 



다행인 건(!!!) 파이브에게 시간 이동 능력이 있다는 것. 그래서 멸망 직전에 엄브렐러 아카데미는 파이브의 능력을 빌려 이동한다(물론 옮겨간 시간대가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다는 한계가 있긴 하다). 근데 엄브렐러 아카데미가 어떤 타임라인으로 이동하면, 그들의 어떠한 행위들이 그 타임라인에 또 위기를 불러온다. 그러면 그들은 또 세상을 구하려 한다. 하지만 위기는 점점 더 커지고…그래서 또 멸망 직전에 이동하고…그러면 또 위기가 생기고…의 무한반복.

 

익숙한 장면들도 있지만 처음 보는 장면도 있는 것이다. 이 모든 장면이 엄브렐러 아카데미가 '세계를 종말로 이끈' 것...


그래서 파이브의 말처럼, 엄브렐러 아카데미가 존재하는 이상 우주는 폭발한다. 어떻게도 이를 바로잡을 수 없다. 엄브렐러 아카데미의 운명 자체가 ‘거듭해서 무한히 세상을 구하거나 파괴할 운명’이기 때문에. 따라서 이 무한한 붕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엄브렐러 아카데미의 존재를 없애고, 그들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가 유일한 세계가 되도록 하는 것...말고는 없는 것이다.

 

이때가 2차로 철렁했던 때... (아니 파이브 이 '거듭해서'를 끊을 생각인 거야????? 싶었기 때문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시즌4 마지막회 중간쯤에 애비게일과 하그리브스의 대화 장면을 보면(아마도 죽음 직전), 애비게일이 하그리브스에게 “우리 세상이 무너진 걸로 충분하지 않았어? 왜 그걸 세상에 풀어놨어?”라고 묻는다.  여기서 ‘그것’은 마리골드를 가리킨다. 마리골드는 엄브렐러 아카데미를 탄생시킨다. 하그리브스가 엄브렐러 아카데미를 탄생시킨 것은 애비게일을 다시 만나고 싶기 때문이었다...즉 애비게일 입장에서는, 하그리브스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엄브렐러 아카데미를 탄생시킨 것 자체가, 잘못이었던 거다.

그리고 애비게일은 벤과 제니퍼를 만나지 못하게 하려는 하그리브스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게 한다. ‘정화’, 즉 세계를 끝장내는 것이 애비게일의 의도였던 것이고, 이것은 하그리브스 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애비게일이 정말 세계를 끝장내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애비게일은, 이제까지 엄브렐러 아카데미가 어떻게든 세계를 구하려고 노력했듯이, 이번에도 세계를 구하려고 노력할 것을 예상한 건 아닐까. 그래서 세계를 멸망의 절벽에 또다시 올려놓은 게 아닐까.

 

이때는 더이상 철렁하지 않았다. 확신했으니까. 아 끝이구나, 파이브가, 엄브렐러 아카데미를 끝내려고 하는구나...(눈물바람)

 


물론 이전까지의 노력은 ‘자신을 포함한 세계’를 구하는 것이었으나 이번의 노력은 ‘자신을 정화의 불길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세계를 구하는 것’, 즉 자신들의 존재 자체를 없애는 것이므로, 이번엔 세계를 구하지 않겠다고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남매들은 처음에 파이브가 자신들 몸 안의 마리골드를 정화 속 두랑고와 융합시켜 소멸시켜야 한다고 할 때, 거부하니까. 그리고 파이브와 함께 또다른 시간선으로 이동했을 수도 있겠지. 무한한 붕괴를 계속하면서, 그들의 생명도 계속 이어지는 것.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결심하고, 자신들의 존재를 無로 돌림으로써, 시간선을 하나로 합치고, 그 하나가 된 시간선에서 자신들이 사랑하던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클레어가, 그레이스가, 쌍둥이들이. 실제로 그들은 2024년 8월 8일의 세계에서, ‘평범한 날’의 일상을 누린다. 평화롭게.

 

처음 볼 때는 제가 눈물이 나서ㅠㅠ 이 장면 제대로 못봐가지고 리플레이함ㅠㅠㅠㅠ 이 잔디밭 장면 너무 아름답고 슬프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 사람들 하나하나가 그냥 다 모르는 사람들이 아닌 것이에요 진짜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래서 나는ㅠㅠ 마지막 시즌의 마지막회를 보며 상견니 생각이 많이 났다ㅠㅠ 자신이 존재하는 세상에서는 리쯔웨이의 삶이 제대로 이어질 수 없음을 깨닫고, 자신의 존재 자체를 無로 돌리는 황위쉬안의 그 선택이, 엄브렐러 아카데미의 마지막 선택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무의식 중에 들었나보다.


그렇다면 이건 시간 여행을 다룬 작품들의 한계...아니지 한계라기보다는 시간 여행을 다룬 작품들이 근본적으로는 비극적 결말로 끝날 수밖에 없는 서사적 특성이라고 봐야 되는 걸까. 한 인물이 원래의 자기가 존재하는 타임라인이 ‘아닌’ 또다른 타임라인에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 시간 여행이니까. 그런데 어떤 타임라인에 ‘없던 존재’가 새로 생긴다면, 기존의 세계는 흐트러진다. 하나의 존재가 발생한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세계의 모양을 바꿔놓는 거니까. 그러면 원래 세계의 흐름이, 역사가, 질서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건 어떤 식으로든 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텐데, 좋은 영향도 있겠지만 모든 일엔 양면성이 있으니까 당연히 안좋은 영향도 있겠지.

멀쩡한 주인공(!) 즉 공감 가능한 캐릭터라면 자신의 시간 여행이 세계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또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미칠 부정적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리 없다. 세계에 닥칠 문제를 해결하고 싶을 것이고(이게 엄브렐러 아카데미)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겪게 될 문제를 해결하거나 그의 삶을 지켜주고 싶겠지(이건 상견니일까...아니면 엄브렐러 아카데미의 마지막 시즌일 수도 있고...). 내가 그 사람의 삶에서 사라짐으로써 그 사람의 삶이 평화롭게 지속될 수 있다면, 사라지는 걸 선택하는 것이다. 그냥 계속 시간 여행을 하면서 그 사람 곁에 머무르는 것을 포기하고. 그래서 시즌 4 마지막회는 이렇게 슬플 수밖에 없었나보다...

 

이런 사진만 남기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루서는 같이 찍히지도 않았는데 엉엉엉엉엉


푸른 풀밭에 시즌 1부터 나왔던 인물들이 각자의 하루를 평화롭게 누리고 있는 모습이 펼쳐지는데, 그 어디에서도 남매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어서 ‘아니 이렇게 끝나면 안되지ㅠㅠㅠㅠㅠㅠㅠㅠㅠ’하는 심정으로 멍하니 엔딩 크레딧을 다 봤다. 배우들이 웃으며 촬영한 사진들과 함께 엔딩 크레딧이 끝난 후, 다시 아까 그 풀밭의 나무가 나오고, 나무 밑에서 마리골드 여덟 송이가 활짝 피어나는데, 와 나 정말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남매들이 정화에 잡아먹힐 때보다 더 슬펐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음악은 너무 경쾌하고 화면은 너무 밝고 마리골드는 너무 예뻐서 더 슬펐음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마리골드 필 때 효과음마저도 경쾌함 아놔 진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여튼간 저는 당분간 시즌1부터 다시 돌려볼 계획이고요...보는 김에 상견니도 오랜만에 다시 한 번 같이 보고 싶은데 상견니 서비스하는 OTT가 없으니(대체 왜!!!!) 영화라도 봐야겠다. 그리고 마지막회의 마리골드 보고 있으려니 굿플레이스의 결말(엘리너ㅠㅠ)도 생각나서 굿플레이스도 같이 다시 볼 계획......이렇게만 봐도 다른 시리즈 볼 필요가 없겠네(라고 쓰지만 그럴 리 없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바냐, 벤, 파이브, 클라우스, 앨리슨, 디에고, 루서...거기에 라일라도 더해야겠지. 덕분에 올해 즐거웠다. 한동안 퍼펙트 데이즈 OST를 돌려 들으며 지냈는데 엄브렐러 아카데미 OST도 같이 들으며ㅠㅠ 여운을 즐기고 있어야지ㅠㅠㅠㅠ 고마웠어 남매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니 어떻게 영화버전으로 뭐좀 만들어주면 안되나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