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거짓말 (정이현, 문학과지성사, 2007)
2009. 5. 7. 00:22ㆍ흔드는 바람/읽고
오늘의 거짓말 정이현 지음/문학과지성사 |
정이현의 첫 번째 소설집인 <낭만적 사회와 사랑>은 꽤 도발적이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그 소설집에 수록된 이야기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진보적이고 혁명적이진 않았지만 그 인물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에 시퍼런 날이 서 있다고 느꼈었다. 누군가는 지독하게 사회순응적이고 속물적이라고 마구 욕할지도 모르는 그녀들이 사실은 그녀들을 욕하는 그들보다 '한 수 위임'을 보여주는 듯해 통쾌했달까.
그러나 <오늘의 거짓말>을 읽고 나서는 그닥 유쾌하지 않았다. 재미있는 영화의 결말 부분만 놓친 듯, 뭔가 모자라다는 기분으로 책을 넘겨 보면서 왜 이런 기분이 들까 생각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 기대했던 것과 읽고 나서 느낀 것이 너무 달랐던 탓이라는 것을.
나는 <익명의 당신에게>의 연희가 덜덜 떠는 한상현에게 "꺼져 이 새끼야!"라 퍼부어준 후 뒤도 안 돌아보고 일어서길 바랐으며, <어금니>의 어머니가 정신 못 차리는 아들내미의 뒷통수라도 한 방 갈겨주길 바랐다. 그러나 어머니도, 연희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랬다.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낭만적 사회와 사랑>의 여인들보다 훨씬 '착했다'.
그들은 별 문제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살아간다. 자신의 일상이 지리함을 때때로 느끼지만, 그렇다고 그 삶을 전면적으로 수정하거나 내던지려 하지 않는다. 그러다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 변화없이 이어지기만 할 것 같던 자신의 삶이, 진부하게만 보이던 그 범속함이, 사실은 매우 위태위태하고 깨어지기 쉬운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깨어지기 직전까지 간 자신의 일상을 완전히 흐뜨러뜨리고 거기서 벗어나려 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오히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되묻는 듯한 표정으로 '거짓말'을 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이들의 음모에 침묵으로 합작한다.
음모에 합작하고 있는 인물들을 바라보면서 나 역시 그 음모에 공모하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채, 그들의 평화롭지만 정의롭지 않은 일상은 유지된다. 그 장면을 보는 나는 그저 씁쓸하게 웃을 뿐, 이 인간들은 왜이렇게 비겁하고 비열한거야? 라고 큰 소리로 신경질을 내지 못했다. 나 역시 그들과 비슷할 테니.
소설집에서 가장 좋았던 두 편은 <삼풍백화점>과 <위험한 독신녀>. <위험한 독신녀>의 현주는 자신이 지금 스물 다섯 살이라고 착각 중인 친구 채린에게 '네가 틀렸다'고 깨우쳐주지도 않고, 채린의 뒷담화를 하며 "...혹시 어떻게 끈이 닿더라도 절대 모르는 척해야 돼"라고 이야기하는 친구들에게 '사실은...'하며 채린의 근황을 전하지도 않는다. 대신 오래된 자신의 악의를 떠올리고 어디서부터 사과해야 할지 막막했다고 털어놓으며, 1990년에 자신이 입던 옷을 찾아 입고 둥글게 만 앞머리에 헤어스프레이를 힘껏 뿌리고는 위험하지 않은 길은 어디에도 없을 것임을 떠올리며 그녀에게 간다. 이 현주의 거짓말이야말로 이 소설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짓말 아니었을까. 아무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본의 아니게 거짓말한 사람으로 낙인찍혀버린 채린에게, 그래서 모두들 외면하고 미워하는 채린에게 용기내어 다가가는 현주의 마지막 모습이 마음을 울렸다.
그리고 <삼풍백화점>. 나에게 삼풍백화점 붕괴는 사건이 아닌 참사였다. 부실 시공으로 대표되는 한국식 빨리빨리와 무사안일주의, 강남의 백화점으로 상징되는 천민 자본주의의 비극이라 했다. 밤을 새워가며 뉴스속보를 보고 관련 기사가 실린 신문을 반복해 읽던 나는 '삼풍백화점'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 사고로 가족을 잃고 통곡하던 이들과 'OO일만에 극적 구조된 생존자'를 자연스레 떠올리곤 했다.
그래서였을까, 그토록 무시무시한 사건을 '동네 주민'의 눈으로 감정의 폭발 없이 비교적 담담하고 차분하게 적어내려간 이 소설은 낯설었지만 인상적이었다. 고향이 꼭, 간절하게 그리운 장소만은 아닐 것이라는 고백의 솔직함과 그 아이가 R의 딸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는 소망의 간절함이 긴 여운을 남겼다. 솔직히 R의 죽음 앞에서 눈물짓거나 황망해하는 '나'의 이야기가 아주 조금은 나올 거라고 예상했기에 결말을 보고 조금 당황했는데, 마지막까지 R의 안부를 정확히 전하지 않은 것은 사고 이후 살아남은 자들과 그 사고로 살아남지 못한 이들, 양자를 함께 배려한 작가의 신중함이었으리라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계속 기억나는 <삼풍백화점>의 한 부분.
저녁을 짓다 말고 찌개에 넣을 두부를 사러 삼풍백화점 슈퍼마켓에 간 아랫집 아주머니가 돌아오지 않았다. 도마 위에는 반쯤 썬 대파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며칠 뒤 조간신문에는 사망자와 실종자 명단이 실렸다. 나는 그것을 읽지 않았다. 옆면에는 한 여성 명사가 기고한 특별 칼럼이 있었다. 호화롭기로 소문났던 강남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대한민국이 사치와 향락에 물드는 것을 경계하는 하늘의 뜻일지도 모른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나는 신문사 독자부에 항의 전화를 걸었다. 신문사에서는 필자의 연락처를 알려줄 수 없다고 했다. 할 수 없이 나는 독자부의 담당자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 여자가 거기 한 번 와본 적이나 있대요? 거기 누가 있는지 안대요? 나는 하아하아 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미안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내 울음이 그칠 때까지 전화를 들고 있어 주었던 그 신문사 직원에 대해서는 아직도 고맙게 생각한다. (p.65)
http://blueingreen.textcube.com2009-05-07T13:46: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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