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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드는 바람/보고

[영화] 그을린 사랑, 2011

그을린 사랑

영화를 보고 나서 아, 이건 DVD가 나오면 정말 꼭 사야겠다, 대사 하나하나 장면 하나하나 꼭꼭 씹어보며 다시 봐야겠다, 하는 마음을 먹는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영화 파일을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DVD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킬만큼 마음을 쾅 치는 영화를 만나는 게 쉽지 않아졌다는 것 역시 큰 이유이다. 재미있고 인상적이고 감동을 주는 영화들은 참 많지만, 그래서 오히려 재미없는 영화를 보는 게 어려워졌지만, 흥미와 감동이 평준화된 느낌이랄까. 못 봤으면 정말 큰일날 뻔 했다 싶은 영화를 본 지는 꽤 오래 되었다.


앞부분에 이런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건-그렇다. 뻔한 거다. 그랬던 내게, 그을린 사랑은 DVD를 꼭 사서 대사 하나하나 장면 하나하나 다시 꼭꼭 씹어보며 다시 봐야겠다 하는 마음을 
오랜만에 먹게 한 영화였고, 이걸 못 봤으면 정말 큰일날 뻔 했다고 생각하게 한 영화였고, 마음을 쾅 치는 영화였고, 극장에서 입을 막고 울게 한 영화였고, 영화가 끝난 이후에 알아보지도 못하는 프랑스어 자막을 보며 넋나간 듯 앉아있게 한 영화였고, 끝나고 나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발을 옮기는 것도 무겁게 만들었던 영화였다는, 거다.




(여기서부터는 스포 가득)

처음 그을린 사랑에 관심을 갖게 된 건 항상 머릿속을 비우고 보는 '출발 비디오 여행' 덕분이었다. 박경추 아나운서가 소개하는 유비무환 코너에 이 영화가 나왔는데, 예의 뻔한 헐리우드 영화나 블록버스터, 유명한 배우의 얼굴값에 의존하는 영화가 아니라서 눈길이 갔다...만,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수수께끼를 풀러 간다는 이야기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심드렁한 기분으로 TV를 보고 있다가, 바로 이 대사에 꽂혔다 : "때로는 모르는 게 아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지" (예전에 크파르 리얏에서 간수를 했다는 남자가 잔느에게 들려주던 말. 한 글자 한 글자 정확하진 않겠지만 대충 이런 뉘앙스) 어쩌면 그 말이 이 영화를 아주 거칠게 요약할 수 있는 말인지도 모른다. 차라리 모르고 사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을 것 같은, 무서운 비밀.



본격적인 '영화 속 이야기'의 시작은 나왈의 죽음이다. 어머니인 나왈은 시몽과 잔느, 두 쌍둥이 남매에게 숙제와 같은 유언을 남긴다. 얼굴 한 번 본 적도, 이야기 들은 적도 없는 오빠/형과 아버지를 찾아 자신의 편지를 전하라는 것이다. 빛 속에 진실이 드러나고 나면 시몽과 잔느도 편지를 받게 될 것이라고 한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 황망해하는 남매에게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숙제였을 테다. 유언을 전해들을 때도 내내 부루퉁해 있던 시몽은 당연히, 거부한다. 그러나 잔느는 나왈이 남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길을 떠난다.

하나의 도착지에서 다음 도착지로 이동할 때마다 잔느를 기다리는 건 이미 먼지가 쌓일 대로 쌓인 탓에 힘을 주어 먼지를 닦아내야만 하는 과거의 흐릿한 흔적이다. 애써 그 흔적을 선명하게 살려낼 때마다 잔느는 실제 나왈과 자신이 알던 나왈이 얼마나 다른 존재인지 깨달아 간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황망했을 텐데, 고통 끝에 더 큰 고통을 얻게 되는 상황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어머니의 몸과 마음 곳곳에 새겨졌을 통증이 자신의 몸과 마음에 전해지는 것을 느낄 때마다 포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학자인 잔느가 그 길 중간에서 뒤돌아서지 않는 건 당연한 귀결이었을 게다. 수학이란 모순 없는 증명의 과정을 통해 명확한 답 하나를 찾아 나가는 과정이니까.

하지만 1+1=2를 믿는 잔느에게 1+1=1이라는 공식은 풀 수 없는 것이었을 테고, 결국 1+1=1을 해결하는 역할은 시몽에게로 넘어간다. 시몽/잔느가 크파르 리얏에서 태어난 사르완/자난임을 이미 알아버린 시몽이기에, 더이상 '자신들의 출생과 관련된 비밀'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기
 인생의 시작점이 분노와 증오였음을 확인한 후 자신의 존재가 뒤흔들리는 듯한 기분 속에서, 자신이 더러운 피로 잉태된 존재임을 포기하듯 받아들여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과는 달리 '정말 (어머니가) 사랑해서' 태어난 형을 만나고 싶었는지도.  어쨌든 시몽은 자신의 형인 니하드 드 메를 찾고 이전에 알게 된 것보다도 더더욱 충격적인 비밀과 만나게 된다. 1+1=1이라는, 말도 안 되는 공식 뒤에 숨겨져 있던 역설을.

잔느와 시몽을 도와주던 중동 현지 공증인의 대사 중에 '예전에는 '더함'만 있었다'는 말이 있었다. 빼는 것이나 나누는 것은 없었다. 곱해지지도 않았다. 공격과 공격, 다시 공격과 공격, 또다시 공격과 공격. 한 쪽이 한 대로 갚아 주는 것. 너의 폭력이 나를 폐허로 만들고 나의 폭력이 너를 폐허로 만드는, 끊임없는 복수. 1과 만난 1이 2로 제 모습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1이 되어 버리는, 끔찍한 순환. 
 
그러나 나왈이 잔느에게, 시몽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이 단지 그 참혹한 과거 그 자체였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왈의 발자취를 밟아 나가던 길 끝에서 
잔느와 시몽이 1차적으로 맞닥뜨린 것은 1+1=1이 될 수밖에 없었던 나왈의 기막힌 삶이었으리라. 하지만 한 발짝씩 더 나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삶을 끌어안은 나왈의 고귀한 사랑-그 괴로운 삶 속에서 그을리고 그을렸어도 끝끝내 지켜낸, 그을린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왈은 잔느와 시몽이 자신들의 출생을 치욕의 결과로 받아들이거나 자신을 때리고 고문하며 상처입힌 '그 개인'에게 복수해 주기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 오랜 시간 묻어 두었던 사실을 더이상 숨기지 말고 햇빛 아래 드러내는 것. 어둠 속에서 꺼내온 비밀과 마주대한 후 그들의 생명이 얼마나 큰 사랑 속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깨닫게 하는 것. 그래서 역설적으로 그들을, 또 그들의 '형/오빠'와 '아버지'까지도 사랑하게 하는 것. 그리고 '형/오빠'와 '아버지'에게도 그 사랑을 알려주는 것. 그럼으로써 계속해서 1+1=1로서 이어지던 폭력의 사슬을 끊는 것. 나왈이 사랑한 잔느/시몽을, 또 자난/사르완을, 또 니하드를, 그들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것이 나왈의 소망이자 진실 아니었을까.



참 많은 장면이 떠오른다. 영화가 시작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스크린을 꽉 채워 버리던, 니하드의 '무언가를 너무 일찍 알아버린 듯한' 눈빛 속의 슬픔, 아들을 떠나보내던 나왈의 '반드시 너를 찾겠다'는 약속, 총질과 방화로 눈 앞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눈물 흘리던 나왈의 공허한 눈빛, 흔들림 없이 기독교 민병대의 지도자를 암살하던 나왈의 비장한 표정, 크파르 리얏에서 울며 자신의 배를 때리던 나왈의 울부짖음......모두 인상적이었던 장면이다.

하지만 정작 나를 울게 만들었던 건 이런 거였다, 마치 엄마의 자궁 속 같은 수영장 물 속에서 자난과 사르완이 조용히 서로를 끌어안던 장면. '그'의 문신을 본 나왈이 넋을 잃고 의자에 주저앉던 장면. 니하드를 만난 자난과 사르완이 아무런 분노나 적대감도 나타내지 않은 채 편지를 전달하던 장면. 돌아온 잔느와 시몽이 나왈의 편지 앞에서 울먹이던 장면, 노래하는 여인의 무덤 앞에 아부 타렉이 빛을 받으며 서 있던 장면......을 보며 나는 참 많이 울었다.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이 영화가 내게 들려준 말을 요약하면, '사실 저 편에 있는 진실을 보라'는 것 같다. 과거를 잊지 말라고, 부끄럽거나 원망스러워 숨겨 버리지 말라고, 계속 기억해 내고 되살리라고. 그러지 않으면 망각되는 것이 역사이니까. 그렇지만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누고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한 일'을 떠올리면서 가해자에 대한 피해자의 분노에 감정이입하거나 피해자 역시 가해자가 되어 버리면 안 된다는 데 더 큰 방점이 찍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이분법적 사고는 되풀이되는 비극을 불러올 수 밖에 없을 테니까.

서로가 서로를 상처입히고 서로로 인해 상처를 입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있는 것은 멋진 일이다. 그러니 '함께' 있어야 한다. 우리도 함께 있음으로써 우리의 아픔을 함께 극복해낼 수 있을 것이고, 우리와 너희도 서로가 함께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함께 있어야만 그 흐름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왈은 자신있게 그 모든 것이 다 사랑이었다고, 너희의 시작도 사랑이었다고, 너희를 사랑한다고, 잔느와 시몽에게, 자난과 사르완에게, 니하드와 아부 타렉에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아, 압도적인 사랑의 숭고함이라니. 나의 사유를 훌쩍 뛰어넘는 고귀한 사랑 앞에 또다시 감동하면서, 라디오헤드의 이 노래를 듣고 또 듣는다. 부디 이 세계에 평화를. 



http://blueingreen.tistory.com2011-08-02T10:18:000.3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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