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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드는 바람/보고

[영화] 외출, 2005

유경언니와 롯데시네마 라페스타관에서 조조로 외출을 보았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괜찮았다. 허감독님의 영화를 보고 실망하기 싫어서 기대를 줄였기 때문에 괜찮았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외출에 대해서는 크게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허감독님이 외출 때문에 먼저 준비하고 있던 행복을 갑자기(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뒤로 미뤘다는 기사를 맨 처음 보았을 때가 기대감이 정점에 이르렀던 때였고, 그 이후 주인공이 배용준과 손예진으로 정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부터는 기대감이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했었다.

일부러 관련 기사도 찾아 읽지 않았었는데 역시나 관객평보다 평론가들 평이 좋아 '에, 뭐 그렇지;'하는 마음이 되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영화를 만든 사람이니까 이번에 어떤 걸 찍었고 앞으로 어떤 걸 찍든지간에 봐 줘야 되지 않겠나, 하는 책임감과 8월의 크리스마스봄날은 간다와는 어떻게, 얼마나 다른지 확인은 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의무감 비슷비슷한 기분으로 영화관을 찾았던 거였다.

 

영화관을 나오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만약 허진호가 아니었다면 더 좋은 영화로 기억될지도 (물론 내게만) 몰랐겠다는 생각. 하지만 그랬다면 아예 안 봤을 가능성도 높았을 테니, 좋은 영화로 기억될 여지조차 없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 결국 이 영화는 허진호의 영화이기 때문에 전작들과 떼어놓고 생각하기가 너무 힘들다는 생각. 또 허진호의 영화이기 때문에 실제보다 과대평가되거나 과소평과되는 측면이 분명 있을 것 같고, 그 중 어떤 것이라도 감독 자신에게는 과히 좋지 않을 것 같은데?-하는 생각.

8월(의 크리스마스)과, 봄날(은 간다)과, 외출을 내 느낌대로 비교해 본다면...외출이 가장 덜 다정하다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사실 결론만 놓고 보자면 8월이 가장 슬픈 영화고 외출이 가장 행복한 영화인데, 8월은 영화 전체가 고즈넉하면서 따듯한 반면 외출은 적막하면서 차갑다는 느낌을 받았다. 같은 '조용함' 혹은 '여백의 느낌'이더라도 큰 차이가 있었다는 것. 물론 중간중간 안그런 장면들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그랬다(어쩌면 내가 8월을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그리고 워낙 많이 봐서 장면들에 정이 들었기 때문에 그런 건지도 모른다. 봄날은 외출과 8월의 중간 정도?). 세 영화에 다 나오는 벤치 신의 느낌만 봐도, 외출이 가장 냉랭하잖아? (하지만 벤치 신은 세 영화 다 맘에 든다!)

허감독님의 네번째 (장편상업;)영화가 될 '행복'이 어떤 내용인지 까먹어 버리긴 했지만(쿨럭;), 음, 좀 다정해졌음 좋겠는데. 물론 알고보면 8월이 가장 잔인하고 냉정한 얘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영화 속 화면이랑 소리에는 다정함이 가득가득 묻어난단 말이지. 또 8월과 봄날에서는 사진사와 주차단속원, 음향기사와 아나운서라는 직업이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그 직업 혹은 직장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영화의 흐름이 만들어지는 데 비해 외출에서는 직업 혹은 직장이 부차적인 것 같아 좀 낯설었다. 원래부터 그렇게 가려고 했던 거라면 상관없지만,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렇게 된 거라면 좀...; 4월에 눈이 내린다는 발상 자체는 예뻤고, 서영과 인수에게 주는 선물같아서 맘에 들었었지만, 그 콘서트장의 느낌은 좀 생뚱맞기도 했다는 것. 일상으로의 복귀를 나타내려고 했던 건 알겠는데, 사진사 정원과 음향기사 상우가 긴밀하게 연결된 느낌이 있었던 반면 조명기사 인수는 극 전체적으로 볼때 별로 긴밀하다는 느낌이 없었다.

 

배용준의 연기는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많은 부분 스크린 위의 얼굴을 인수라고 느꼈다. 그런데 중간중간, 배용준도 아닌 '욘사마'가 확 다가와 느낌을 확 깨곤 했다; 예를 들면-그 일반인스럽지 않은 초콜릿색 반듯반듯 근육이라든지, 옆에서 유경언니가 협찬이 분명한 브랜드들이 나오고 있음을 알려주셨을 때라든지. 서영의 남편 장례식장에 갔을 때도 너무 폼이 났다. 옷빨이 좋아도 문제야; '욘사마'의 후광이 너무 큰 나머지 보는 사람들도 인수를 인수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그다지 하지 않는 것 같다. 배우 배용준에게는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차안에서 혼자 노래 따라부르며 악쓰는 장면, 벽에 눈뭉치 던지는 장면, 이삿짐 나르다 굳은 짜장면 먹는 장면 같은 건 좋았는데...(역시 디테일에 강한 허감독님)

생각보다 서영 역의 손예진은 매우 괜찮았다! 손예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연애소설을 보고 경악했고, 그 이후로 손예진이 나오는 영화는 보지 않았다;) 이 영화를 보고 많이 좋아졌다. 좋아하지 않던 전도연을 '나도 아내가~' 이후로 좋아하게 된 것과 비슷한 상황^^; 예쁘게 보이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아이러니하게 그 모습이 너무 예쁜 것이다. 그냥, 얼굴이 예쁘고 몸이 예뻐서 예쁜 게 아니라, 서영이로서의 모습 자체가 너무 예뻤다고나 할까. 배용준과 세워 놓으면 별로 어울리지도 않겠는데? 했는데, 생각보다 그림도 괜찮았다.

가장 맘에 들었던 장면은, 삼척모텔 맞은편 카페에서 모텔 창가에 비친 인수를 바라보며 눈물흘리던 서영의 모습-잠시 유리창 바깥의 다림을 바라보던 정원이나, 유리창 안의 은수를 바라보던 상우의 모습이 겹쳐지기도 했다. 바퀴달린 가방을 끌고 터벅터벅 걸어가던 그녀의 뒷모습은 참 아팠다. 더이상의 설명 따위가 없어서 더 좋았고.

 

어쨌든, 외출은 나중에, 좀 지나서 다시 한 번 봐야겠다. 좀 지나서 보면 느낌이 많이 달라질 것 같다. 지금은 좀 모르겠다, 는 게 솔직한 심정이고. 그리고 행복이 예쁘게 나왔으면 좋겠다. 희망사항은 역시나 다정한 느낌. 아저씨와 허감독님이 다시 한번 만나봐도 참 괜찮을 것 같은데. 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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