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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드는 바람/보고

[영화] 렛 미 인, 2008


스포왕창.

012

 

1. 지지난주 금요일, 직장 동료들(이라고 쓰니 좀 이상하군 ㅎ)과 함께 본 영화. 그러니 시간이 좀 흐른 셈이다. 어느 기억은 사라졌을 테고, 어느 기억은 왜곡됐을 것이다. 어쨌든 영화관을 들어갈 때, C는 아무 배경지식이 없었고 K는 어린 아이들의 사랑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나는 뱀파이어가 나오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2.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불이 켜진 극장을 나오던 길. C는 '그래서 결국 걔도 그렇게 되는 거야?'라고 웃음섞인 한숨을 내쉬었으며(아니면 한숨섞인 웃음을 지었는지도), K는 '그렇게 피 나오는 영화인지 몰랐어'라며 말끝을 흐렸다. 나는 "아 뭐야 돈 버렸어"라며 감독을 향해 막말을 내뱉는 한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신경이 거슬려 뒷쪽을 째려보느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 한동안 셋 중 아무도 무어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C와 K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음, 머릿속이 복잡했다.


3. 언젠가부터 나는 영화를 볼 때나 책을 읽을 때 집단따돌림에 대한 묘사가 나오면 바짝 긴장해서 예민하게 받아들인다. 그런 현상을 다룬 영화나 책을 일부러 찾아 보기도 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직업병인듯; 영화가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아 오스칼이 '꽥꽥거려, 소리질러, 이 돼지야' 등등의 소리를 혼자 하고 있는 장면이 나오자마자 아, 쟤가 저 피해를 당하고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팍 들어 마음이 아팠다. 보는 내내 오스칼을 괴롭히는 아이들 때문에 화가 났었고, 특히 그놈들이 오스칼의 옷을 훔쳐버려서 그 추운 겨울날 오스칼이 반바지만 입고 집에 돌아가는 장면을 보면서는 욕이 절로 나왔다-_- 그래서 중반부 이후 오스칼이 복수하는 장면(!)이나 후반부에 피바다가 된 수영장이 잡혔을 때는 약간 통쾌했다. 아, 난 인간에 대한 사랑이 너무 부족한 걸까.

집단따돌림을 당하는 애들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경우, 가해자에게 자신이 받은 괴롭힘을 '가상의 가해자'에게 되돌려주다가 결국은 이를 현실의 가해자에게 옮기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대부분인 듯 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자신이 당한 괴롭힘을 '그 가해자'에게 되돌려주는 대신, 자신도 또다른 이를 괴롭힘으로써 또다른 피해자를 만들어내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고 보면 영화가 아무리 잔인하다고 해도, 현실만큼 잔인하지는 않다. 참 슬프다.


4. 실핏줄이 비쳐보일 정도로 새하얀 얼굴과 햇빛 아래 서면 백발같이 보일 정도로 반짝이는 금발. 이렇게 비현실적인 오스칼의 외모는 하얀 눈으로 뒤덮인 영화의 배경과 참 잘 어울렸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만큼.


5. 그와 확실히 대조되던, 까만 머리에 까무잡잡한 피부의 이엘리. 서너 살은 더 많아 보이던. 그들의 너무 다른 외모는 영화 초반,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이 기묘하게 느껴지던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이엘리가 그 추운 날 반팔을 입고 있더라는 것-_- 거기서야 겨우 '아, 쟤 보통 애가 아니구나'했으니 이것 참.


6. 이엘리와 오스칼은 정말 하나였을까? 나는 너라던 이엘리의 말이 사실이었을까? 이엘리는, 친구도 없고 자신이 괴롭힘당할 때 도와줄 형이나 누나도 없으며 그나마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아버지와는 떨어져 살고 있는 오스칼의 지독한 외로움이 만들어낸 그의 그림자였을까? 오스칼이 갖고 싶어했던 친구의 모습을 꿈꾼 데 불과했을까? 남들이 자신을 때리고 욕하고 손가락질해도 묵묵히 참으며 마음 속으로 분노를 차곡차곡 쌓아가던 오스칼이 자신을 괴롭히는 이들에게 대항하고 맞서는 인물로 변하기 위해 필요로 했던, 오스칼을 자극하고 오스칼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가상의 존재였던 걸까? 정말, 이엘리는, 오스칼의, 또다른, 자아였을까? 

답을 누가 알겠냐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엘리가 어둡고 공격적이며 사랑을 적극적으로 갈구하는, 오스칼의 숨겨진 자아일 뿐이다-라는 답은 오스칼이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니까. 그렇다면 오스칼은 너무 외롭고, 이 얘기는 너무 슬퍼지니까.

물론 오스칼과 이엘리의 미래가 찬란한 무지개및은 아니리라. 영화의 후반부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이엘리는 오스칼을 지켜주려고 노력하겠지. 싸우려고 발버둥쳐보지만 아직은 연약한 오스칼이 위험에 처했을 때면 나타나 도와주겠지. 하지만 만약, 오스칼과 이엘리가 정말 함께 떠난 거라면, 둘이 함께 떠난 거라면...

오스칼은 어른이 되고 늙어가고 죽게 되는데 이엘리는 계속 열 두살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남아 있었겠지. 이엘리는 오스칼을 처음 만나던 때의 이엘리가 그랬듯이 또다른 어린 아이를 만나고, 그와 소통하고, 그를 끌어들이게 될 거고, 오스칼을 밀어내게 되었을 거다. 결국 오스칼은 이엘리가 먹을 피를 구해오는 것에서만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인간이 될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살인을 하고, 도망을 가고, 또다시 살인을 하면서. 그래서 염산 때문에 뭉개져버린 얼굴을 이엘리에게 내밀며 피를 빨아먹히는 것이 몇십년 후 오스칼의 모습이라면...그들이 만난 것 자체가 비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래도, 여자애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오스칼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지도 못하지만, 이엘리가 실제로 있었으면 좋겠다.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무엇이든간에', "내가 좋니?"라는 질문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리던 그 순간만큼은 진실이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 진실된 딱 한 순간의 감정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남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고, 자신의 전부를 걸게 되는 목적이 되기도 하니까.


7. 이 영화에서 제일 충격적이면서 가장 슬펐던 장면은 이엘리의 '피눈물'. 초대받지 못한 자의 한과 슬픔과 분노가 서려 있던. 그 어린 표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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