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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드는 바람/보고

[영화] 여기보다 어딘가에, 2007

영화를 처음 본 금요일. 자꾸 속이 까끌까끌했다. 처음엔 준석님이 너무 연기를 잘하셔서 그런 줄 알았다. 사실 좀 그렇기도 했다. 스크린에 비친 모습 볼 때는 마냥 좋았는데, 끝나고 나니 '저거 원래 모습 아냐...'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기분이 묘한 거다. 내일 다시 보면 좀 명확해지겠지, 하면서 다음날을 기다렸다. 그런데 토요일날, 검은 스크린 위로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을 멍하니 보고 있으려니 더 이상했다. 게다가 그 전날 '되게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인 애'라고 생각했던 수연이에 대한 연민까지 자꾸 뭉게뭉게 피어올라와 마음이 무지 복잡해졌다. 왜 이러지? 왜 자꾸 공감이 되지? 하고 갸웃갸웃하며 집으로 돌아오던 길. 버스 안에서 친구의 문자를 받고서야 생각이 났다. 3년 전 늦가을, 그 시간이.

학생회관 3층 가장 오른쪽 방. 어느 한 명의 투덜거림이나 한숨 소리를 신호로 자연스럽게 "아, 진짜 졸업하고 싶다. 근데 우리 졸업하면 뭐 해서 먹고 살지?"하는 얘기가 튀어나오던 때. 공허하게 부딪치던 눈빛들과 짧은 침묵. 하지만 누구도 울먹이는 목소리로 자신의 걱정을 내어놓지 않았다. 한 번 그랬다가는 정말 걷잡을 수 없게 되어버릴 거란 사실을 다들 너무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대신 낄낄댔다. K는 800점대에서 멈춰버린 토익점수 때문에 ELS를 욕했고, S는 중아와 재복이의 말투를 따라하느라 바빴으며, Y는 죽어라 말 안듣는 학원 애들때문에 이마에 지렁이를 풀었다. 그리고 나는......나는?

가고 싶은 대학원의 등록금이 너무 비싸다는 걸 깨닫고 그러면 그냥 학부 전공대로-하고 나이브하게 생각했던 내게 엄마는졸업하면 뭐 할 거냐고 물었다. 그럴 듯한 대답이 한 가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아예 생각하기를 그만둬 버렸다.그랬더니 별로 우울하지도 않았고 갑갑하지도 않았다. 무책임하게도 그냥 오기만 부렸다. 뻣뻣하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야, 꿈 하나 지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냐?"고 정색하던 수연이처럼, 엄청나게 열심히 하는 것도 없으면서 "너 그렇게 놀아도 되냐?"는 엄마에게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 거거든!!"하고 버럭 화를 냈다. "난 정말 잘 할거고, 정말 자신 있어"라면서도 금방"너랑 상관 없어"라고 주눅들어버리던 수연이처럼,자신도 없는 주제에 여건만 된다면 잘 할 수 있노라고 말만 했다. LIPA 입학 원서의 빈칸을 꽉꽉 메우고 현에게 "유학 갔다 오셨다면서요?"라고 동경어린 목소리로 말을 건네던 수연이처럼, 누가 대학원에 가거나 유학을 간다고 하면 부러움 묻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이고 대책없고 말도 안되는 캐릭터라고 생각했던수연이의 모습에그 때의 내 모습을 겹쳐 보고서야 겨우 깨달았다. 지금의 나나 그 때의 나나, 특별히 다르지 않다는 걸.

그래서 세 번째로 영화를 본 날엔 수연이에게 정말 심하게 공감해 버렸다. 수연이가 "엄마가 못 갔다고 나도 가지 말라는 게 논리적으로 말이 돼?"라고 따져물을 때에는 얼굴이 화끈거렸고, "인격적으로 대해 주세요!"라고 큰소리칠 때는 눈을 감아버렸다. "너 되게 이기적이야, 알아?"라는 동호의 말에 "알아, 내가 제일 잘 알아"라고 악을 쓸 때는 눈물이 핑 돌아서 남이 볼세라 볼을 훔쳤다. 재미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표정으로 3만원에 옷을 팔아버릴 때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뭔들 하고 싶겠니. 억지로 몸을 일으켜 거기까지 왔겠지만, 어디론가 가버린 마음은 잡을 수 없었겠지.

 

 

나는 이 영화가 좋다. 준석님이 나오셔서 더 좋기도 하지만, 나오지 않으셨어도 좋아하게 됐을 것 같다. 중간중간 웃음이 터지는 부분들도 적지 않다. 특히 동호의 학과장 면담을 전후한 장면이나 현의 찌질함이 드러나는 장면들이 재미있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와 수연이에게 공감하진 않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은 영화 속에서 자신이 꿈꾸는 모습이나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고 싶어하지, 고개돌리고 싶은 모습이나 부끄러운 모습을 발견하고 싶어하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래도 수연이를 옹호하고 싶'고, '네 탓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주고 싶다는 감독님의 말에 공감한다. 자신과 함께 100미터 달리기를 시작한 사람들이 모두 자기 앞에서 달려가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냥 꼴찌로 들어가야 하나, 아니면 확 넘어져버릴까 고민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영화를 만들었다는이야기에서 진심이 느껴져 마음이 울린다. 재능도 부족하고 자신도 없고 빽도 없는 스스로를 초라하고 한심하게 여기는 이들이수연이의 모습에서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고개를 돌리는 대신, 수연이를 통해 스스로를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그리고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수연이와 동호가 함께 웃으며 화면에서 사라져 가던 것처럼.

 

 

* 전체적으로 디테일에 신경을 많이 썼구나! 싶었는데, 백수인 수연이와 복학생인 동호의 모습을 그린 부분은 특히 더 그랬다. 혼자 자취하는 동호가 집에서 라면만 끓여 먹는 거라든지, 학교 식당에서 떼로 밥먹는 사람들 틈에 끼여 밥을 먹는 장면이라든지, 반찬을 다 담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담는거라든지, 돈을 벌지 않는 수연이가 오래된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는 거라든지(내가 2001년에 쓰던 핸드폰이더라)...이 장면도 그 중 하나. 집에서 전화할 때는 집 전화를 쓴다는 거 말이다. 베개 옆에는 소규모아카시아밴드의CD도 보이고.


* 영화 보기 전에 이 스틸을 봤을 땐 무지하게 절망적인 상황인가, 했었는데 다행히(?) 그 정도는 아니었다. 동호를 보면서 대학교 1, 2학년 때 한참 기타 들고 다니던 고등학교 동창 녀석이 생각나기도 했다. 걔를 만날 때마다 나도 물어 봤었는데, "너 아직 기타 치냐?" 라고. 그나저나 집을 나갔을 때, 저렇게 찾아갈 수 있는 친구가 '남자'라는 건 여자인 수연이에게 좋은 걸까 나쁜 걸까;


* 자
주 한강에 나와 음악을 듣던 수연이. 한강이 특별히 좋아서라기보다는 돈도 없고 갈 데도 없고...그래서 그런 거 아닐까. 뭐 그렇게 가다 보니 좋아지기도 했겠지만. 갈 데 없고 돈 없던 고등학생 때, 마음이 갑갑할 때마다 "야, 한강 가자"고 주위 사람들을 꾀던 친구들이 문득 떠오른다.


* 현실적으로 가장 싫어하는 캐릭터. 동호의 말을 빌면 "인간이 안된", "싸가지없는 새끼". 강한 사람한테는 약하고 약한 사람한테는 강한 인간. 이 영화에는 한국영화답지않게 욕이 별로 안 나오는데, 이 사람이 나오는 장면에선 꼭 욕이 나온다. 페스티벌에서 "Shut Up!"하고 노래를 부를 땐 '그래 너 말이다. 너 좀 닥치란 말이다'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ㄷㄷㄷ.


* 마지막날 실물로 보기도 했던!! 동호 역의 유하준씨. 승열오빠의 '이유'와 메리네 & 지선언니의 '우리 사랑하지만' 등을 듣기 위해서 듬성듬성 봤던 <어느 멋진 날>에서 처음봤던 배우. 그 때의 변태오빠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 영화 보기 전에는 좀 걱정했었다. 눈빛은 이글이글한데 연기는 어색하고 캐릭터는 완전 비호감이었으니까. 그런데 의외로 괜찮았다. 변태오빠 때는 되게 못되게 생겼네, 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일상적인 역할 하는 거 보니까 딱히 그래 보이지도 않고. 게다가 어리버리하고 학교에 잘 적응 못하고 재미없어하는 모습이 정말 군대 갔다 온 복학생 같은 거야! 덕분에 지금은 호감으로 바뀌었다. 처음엔 동호가 수연이를 좋아한다(예전부터 좋아했을지도)는 느낌이 너무 옅지 않나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자기 방에서 퍼질러 자고 있는 수연이를 처음 봤을 때 표정이 밝아지는 거라든지, 성숙이에게 "짝사랑은 참 힘들지?"라고 말하는 거라든지...가 동호의 마음을 어렴풋이 보여주는 게 아니었나 싶다.

 

 

 

 

더보기

+ '이승영'이라는 감독님 성함 석 자 처음 듣고 'ㅇ만 ㄹ로 바꾸면 이승열이네?' 하면서 웃었는데 나만 그런 생각 한 게 아니었어; 하하.

+ 차수연씨는 하림의 <여기보다 어딘가에>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기도 했다고 한다(아,나 그 뮤직비디오파일도 있는데 왜 몰랐지;). 엔딩 크레딧 올라갈 때 보니까 차수연-유하준 두 배우가 모두 싸이더스 소속이더라. 후와, 신기해.

+ 악기사 주인으로 나오던 박원상씨, 수연이 아버지로 나오던 이 얼씨, 학과장님으로 나오던 김병옥씨도 인상적이었지만 그보다 더 기억에 남는 건 피씨방 알바생으로 나온 윤종빈 감독. 떠올릴 때마다 묘하게 자꾸 웃음이 난다 ㅎ 두 감독이 굉장히 친한 사이라던데(윤종빈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의 주인공이 '이승영'인 이유도 둘의 친분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더라) 좀더 길게 써주지. 깨고 나서 얼마나 짜증났을까. 주인한테 많이 깨졌을텐데. 불쌍해;

+ 수연이가 로뎀피아노학원에 낸 이력서의 '아버지 이름' 란에 '차 얼'이라고 써 놓은 것을 보고 혼자 피식 웃었다. '공주-만세'라는 메일 주소도 웃겼어.+ 영화에 소규모아카시아밴드 CD가 여러 번 나오는데,왠지 재미있었다. 준석님이 루시드폴 CD 속지를 펼쳐 보시는 장면도 괜히 기억에 남고.+ 소규모아카시아밴드의 음악은 정말 좋았고, 마지막 날의 공연도 좋았다. 나도 CD 가져가서 싸인 받을걸 그랬나봐. 위의 노래들 외에 '또 돌아보고'라는 노래도 있었고, 올드피쉬 노래도 있었다. 제목이 생각 안나네;요조와 소규모아카시아밴드가 함께 부른 <낮잠>이 참 맘에 들어서 집에 오자마자열심히 찾아 봤었는데, 요조 앨범이 이번 달에 나온단다. 아직 나오지 않은 것 같은데 나오면 즉시 뮤지스탤지아에 신청할 거다.근데...솔직히 준석님 버전이 정말 말도 못하게 좋았다. '꿈을 꾸라 하네'라고 할 때 눈물이 막 나.

+ 감독님 싸인이라도 한 번 받을까 했는데 영 쑥스러워서. (그리고 왠지 말을 걸었다간 딴 소리를 하게 될 것 같아서-'준석님이랑 친하세요?' '많이 친하세요?'뭐 이런;;) 어쨌든 이승영감독님 고마워요. 저에겐 좋은 영화였거든요. 준석님 캐스팅해주신 것도 고맙고요. 꼭 극장에서 정식개봉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실물이 사진보다 훨 나아요 ;D

+그러고 보면 '우리는 모두 겁쟁이에요' 라던 승열디제이의 말. 그게 참 듣고 싶었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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