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 15. 20:17ㆍ흐르는 강/소박한 박스
작년 10월에 벙커1에서 '대한민국 넷페미사'라는 강연이 있었다. 강연이 끝난 후에 알았기 때문에 당연히 가진 못했고; 강사 명단을 보다가 호빵언니-권김현영선생님(!!)의 이름을 보고 언제 들어야겠다 싶어 다운받았지만 계속 못 들은 채 해를 넘겼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들었다. 역시 이런 긴 강연은 버스 안에서 듣는 게 제일 집중이 잘 된다-_-)//
전체가 1-3부로 되어 있었는데 재미있게 들은 건 1, 2부였다. 1부에서는 90년대 PC통신시대부터(그때는 '사이버 페미니즘'이라고 불렀지ㅋ) 2000년대 중반이라고는 하지만 초반부 아닌가? 라고 느껴지는 인터넷에서의 여성/ 여성주의 관련 내용들에 대한 강의가 진행됐다. 경험한 적 없는 PC통신 얘기도 꽤 흥미로웠고 달나라딸세포나 언니네나 일다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으으음…이런 기분이 들 거라고 상상도 못했는데, 되게 멍하면서 조금은 울컥했다. 언니네가 보여주었던 여러 가지 아이디어, 시도, 실험, 그리고 실패…에 대한 이야기 부분에서-심지어 언니네 방, 언니네 태그놀이 등의 책 이름도 직접 언급됐다-의외로 많이 뭉클했다.
무엇보다 권김현영선생님(나한테는 호빵언니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지만;)가 어찌나 말씀을 잘하시는지. 이십대 때의 내게 '내가 아는 여성주의자 중 가장 똑똑한 사람 베스트 3 중 한 명'이었고 이 언니 말 들을 때마다 어쩌면 저렇게 내가 뭐라고 언어화해야할지 감을 못 잡는 감정/ 상태/ 상황들을 적확한 언어로 잘 설명해낼 수 있을까 하고 감탄했었는데 십여 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2부인 손희정님의 특강도 재미있었다. 삼국카페와 '배운 여자들' 담론과 그로 인한 backlash와(2012년 대선을 앞두고 많이 일어났었던) 그 이후의 'IS 김군'으로 유발된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해쉬태그, 강남역 살인사건을 비롯한 여성혐오사건들과 관련된 수많은 이슈들, 메갈, 워마드, 트페미 등등. 대부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던 일들.
나는 호빵언니처럼 영페미니스트 운동이 활발하던 때 운동을 함께 했던 세대도 아니고, 대학내 여성주의 운동의 세례를 받아 발을 담근 경우도 아니다. 지적 호기심으로 여성학/ 여성주의를 공부하는 모임을 찾아다니거나 자발적으로 언니네를 찾아가 커뮤니티의 일원으로 자연스럽게 편입된 건 더더욱 아니다. 그냥 혼자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야구를 보고 인터넷을 하고 신문을 읽고, 미디어와 문화를 마음대로 즐기다가, 어 이거 뭐지 이게 아닌데 하며 내 안의 여성주의자를 발견한 것에 가깝다. '내가 너무 이상한 인간이라' 어떤 것을 견디지 못하거나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여성주의는 나에게 가르쳐주었고, 내가 기존의 경험들을 재구성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 사실 나의 정체성이 형성된 건 이쪽에 더 가까운지라;;; 더 생생한 느낌으로 들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데-그때 나는 왜그렇게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고. 왜그렇게 힘들었을까, 왜 자꾸 도망가고 싶고 거리두고 싶고 마음 닫고 싶어했을까.
사실 이 생각은 오래 전부터 해 왔던 거였고, 몇 년 전 도달한 답은 이런 거였다. 그 때의 내게는 사람이 없었다는 거. 일이 먼저였다는 거. 내 주변의 여성주의자들과 오래 좋은 관계를 맺고 함께 어울리며 행복하게 살겠다는 생각보다는 지금 이번주에 이 일을 해야 하고 다음주에는 저 일을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네가 그 일을 해야 하고 나는 이 일을 해야 하고 이렇게 모두다 정해진 날짜까지 일을 다 마쳐서 무리 없게 일이 잘 굴러가야 우리가 하는 운동이 잘 진행되고 그러면 나는 맡은 일을 다 한 거니까 잘 하는 거…처럼 생각했다는 것.
그때의 나를 한 친구는 '아무에게도 관심 없는 평화주의자'라고 했었고, 나는 정말 잘 맞는 말이라고 감탄했었다. 정말이지 20대의 나는 이승열씨와 야구를 뺀 그 무엇에도, 심지어 나에게조차도 관심이 없었다. 그저 내가 하는 '일'을 어떻게든 꾸역꾸역 끝내려고만 했었다. 사람 앞에 나서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다 싫었다. 관계를 맺는 것은 더 싫었다. 그냥 사람 자체가 안 좋았다(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승열오라버니 빼고). 지금의 직업을 갖게 된 후에도 한동안 저런 태도로 살아왔기 때문에 초반에 나를 만났던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점이 많다. 냉소를 하느니 차라리 화를 내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된 것도, 사람을 만나 좋은 관계를 맺고 이를 지키려 노력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걸 깨달은 것도 솔직히 몇 년 안 된다.
그런데 이날 2부를 듣다가 한 가지를 더 알았다. 재미가 없었다. 책임과 의무와 계획은 줄을 서 있었는데, 그 하나하나를 하는 과정은 정말이지 재미가 없었다.
사실 나는 뭔가를 더 알고 싶었고, 더 재미있고 싶었고, 더 즐기고 싶었다. 그러려면 여유로운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배워야 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배울 여유도 즐길 여력도 없었다. 끊임없는 회의와 글쓰기와 PC쓰기…가 이어졌고 그때의 우리는-지금 돌이켜보건대 꽤 고립되어 있었다. 활력에 넘쳐 즐겁게 이벤트를 만들기보다는 '매달 행사를 해야 한다'는 책임감, 혹은 의무감으로 일을 했다. 이건 좀 문제가 될지도 모르겠다 싶어 큰 마음 먹고 한 일에는 미약한 반응이 돌아왔고 너무 당연히 옳은 일이라 별 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던 일에는 엄청난 반격이 돌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피부에 와닿을 만큼 활발한 피드백을 받은 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SNS 따위 없었을 때니 온라인으로 여론을 수렴할 수도 없었다.
어쨌든 열심히는 했는데, 재미가 없었다. 재미가 없으니 자주 도망가고 싶었다.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게다. 그 때의 사람들 눈에도 내가 재미없어 하는 게 보였을 거고, 마음 꽉 닫고 있는 게 보였을 거다. 대학생이 되기 전엔 운동이 하고 싶었는데, '살짝' 발 담가 본 시간 동안 나는 나 자신이 소진되었다고 느꼈고, 지쳤고, 결국 금방 빠져나왔다. 평생 여성주의자로 살기 위해서는 계속 운동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지속가능한 여성운동을 고민하던 친구들과 만나지 않은 지는 너무 오래되었다. 사실 그 때 그들과 함께 지냈던 시간들이 지금 내 기억 속에는 너무 조각나 있다. 현실감이 없다. 어떤 기억들은 경험이 아닌 트라우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넷페미사 1부 마지막 부분에서 호빵언니가 지속가능성에 대해 얘기하는 부분이 참 인상적이었다. 지속가능하지 않아도 된다고. 꼭 오래 계속하지 않아도 된다고. 사람들이 다 영페미니스트 어디갔냐고 하는데, 그 사람들 다 잘 있고 잘 살아 있다고. 그러면 된다고. 어딘가에서 잘 살아있으면 된다고. 대신 재미있어야 한다고. 남들이 볼 때 재미있어 보이면 된다고…그 말에 고개를 계속 끄덕였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 말이 오랫동안 듣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수 년이 지나서야 이렇게 답을 찾고, 그때의 불행했던 나를 이해하게 되는 걸 보면, 나도 참 늦게 아는 것 같다. 그리고 '때'란 빨리 오는 게 아닌 것 같다. 과거의 나에게서 마흔 발짝, 쉰 발짝 정도는 떨어져서, 단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받거나 마음아파하지 않고 그 기억을 떠올릴 수 있게 되어야, 과거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앞으로 나는 뭘 어째야 하나. 답을 알았으니 무슨 교훈 같은 걸 얻었어야 하나.
모르겠지만,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나는 지금의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재미있게 하고,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 내 말과 행동으로 좋은 영향을 미치려고 노력하면, 되겠지 뭐. 괜한 명예욕(따위 0.1도 없고)이나 공명심(같은 건 0.0001도 없다)으로 내 능력과 한계를 벗어나는 무언가에 뛰어들 생각은 전혀 없다. 대신 비겁하거나 부끄럽게 살지는 말아야지. 과거의 나를 너무 싫어하거나 창피해하지도 말아야지. 그냥 지금의 나를, 아주 조금이라도 더 괜찮은 존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지. 이게 최근 몇 년간 내 생각이 도달하는 지점이다. 늘 같은 귀결.
대신 더 공부해야겠다고는 생각한다. 단지 책을 읽는 것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고민을 해보자고. 내 일상에서 실질적인 실천을 더욱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없을까. 더 생각해보자고. 하지만 우선은 이런 이해부터 시작해도 되겠지. 무관심과 냉소밖에 없던 그때의 나를 이해하는 것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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