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103, 이즈음에.

2022. 1. 3. 10:37흐르는 강/이즈음에

'이분 시가 그렇게 좋단다'는 소문을 주워듣고 고민 없이 사버린 이원하시인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를 아껴 읽고 있던 2021년 12월말.

 

특히나 이 시가 너무 좋아서 읽고 또 읽고 더 읽고 있었다.

내일이 1월 1일인데도 이렇게 일을 해야 하다니😑하며 절레절레하고 있는 31일의 내게 마두역에서 싱크홀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왼쪽 사진은 어디서 보고 저장했는지 잘 기억이 안나고(죄송합니다) 오른쪽 사진은 출처: 국민일보.

싱크홀이 종종 발생하던 도시에 살고 있다보니 싱크홀에 대한 경각심이 적은 편이긴 하지만;;; 횡단보도 바로 앞에 있는 큰 건물이래!!!! 라는 말을 듣고는 많이 걱정됐다. 워낙 유동인구도 많은 곳이고 마두역과 바로 이어져있기도 하니까. 혹시라도 큰일이 생겨서😨😨 마두역이 무너져내리거나 하면😨😨😨😨 3호선 완전 마비되는 거 아닌가😨😨😨😨😨😨 싶어 잠시 아찔했다. 얼마전 봤던 영화 '씽크홀'도 잠깐 생각나고.

 

2021년 마지막날 싱크홀 뉴스를 듣는다는 것도 괜히 의미 있게 느껴져서 하루가 지나가기 전에 가보고 와야겠다 싶었다. 작년 한해 가장 많이 간 곳인 호수공원을 12월 31일날 밤에도 걷고 싶어서, 밤늦게 집을 나섰다. 호수로를 지나서 차병원 앞 사거리를 지나서 싱크홀이 생겼다는 건물을 지나서 다시 호수공원으로 돌아오는 코스를 선택했다.

 

막상 도착한 건물 앞은 한산했다(당연한 건가). 불이 다 꺼져 있는 걸 보고 모두 대피한 거구나 싶었다. 뉴스로 볼 때도 '신록내과' 이름 보고 식겁했었는데 직접 가서 건물을 보니 더 아찔했다. 마두역이랑 바로 맞닿아 있는 건물인데다가 건물 내 상가도 엄청 많고. 예전에 저 병원에서 진료받았던 기억이 새삼 떠올라 닭살이 돋는 기분이었다. 간호사님과 환자들이 병원에 가득가득했었는데(코로나 시대 전이긴 했지만). 그렇게 상가 하나하나마다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텐데.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생각, 부디 아무 일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함께 들었다.

 

건물 바로 앞까지는 못 가겠다는 심정이 들었다. 길 건너에서 한동안 바라만 봤다.

돌아오는 길. 밤 열한시가 가까워진 시간. 호수공원을 걸으면서 올해 여기 자주 와서 참 좋았다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킨텍스에 고층단지가 들어오기 전에는 호수공원에서 예쁜 노을을 보는 게 더 쉬웠을텐데, 그때 더 자주 갔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도 좋지만. 사람 적을 때 가려고 해 진 후 자주 가다보니 가끔 낮에 가면 기분이 더 좋아지기도 했다. 엄청 쨍쨍한 여름날 아무도 없는 호숫길을 마스크 쓰고 혼자 땀흘리며 걷다보면 힘들어 죽겠는데 너무 좋다는 기분이 들었다. 비오는 밤에 우산 쓰고 아무도 없는 길을 걷는 것도 즐거웠다. 개구리 소리인지 맹꽁이 소리인지가 너무 크게 들려서 무서울 때도 있었지만ㅋㅋㅋㅋ

 

2022년이 되기를 한 시간 정도 남겨두고, 이날의 밤 풍경을 눈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몸도 마음도 힘들고 코로나는 더 심해지고 세상은 아주아주 조금 나아진 것도 같다가 노답인 것 같다가를 반복했던 2021년. 그냥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봄부터 계속 생각했던 2021년. 이 해가 지나가서 잘됐다고 생각했다. 힘든 한 해 사느라 고생했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파노라마 찍어보겠다고 애써봄ㅋㅋㅋㅋㅋㅋㅋ 너무 어둡게 찍혔지만 흑흑.
아무리 보고 또 봐도 늘 비현실적인 킨텍스 고층단지. 볼때마다 하 인간이란 얼마나 전기를 많이 쓰는가 싶다.
2021년의 평균 걸음수는 이렇게 마감! 9월이 워낙 걷기 좋았어섴ㅋㅋㅋ
그렇게 2021년이 끝나고,

 

2022년 첫날도 호수공원에 갔다. 전날은 해 없을 때 갔으니, 이날은 해 지기 전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때만 해도 다섯시 반쯤이면 해가 졌던 것 같은데, 지금은 여섯시쯤 해가 지는 것 같다. 이렇게 금방 해가 길어졌다는 게 신기하다. 낮에는 사람이 많을 것 같아서 저녁쯤 나갔다. 호수 주변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평소보다 많았다. 많이 북적북적하진 않았다.

 

겨울 나무들, 겨울 해.

해 지기 전 어스름한 때를 좋아한다. 파랗던 하늘이 붉어지는 순간이 금세 사라지기 때문에 더 소중하다. 해 지는 풍경을 본 저녁이 있는 하루가 그런 저녁이 없는 하루보다 더 좋다. 예전에 야근을 한창 많이 하던 시절, 이 시간에 팀원들과 함께 산책하듯 계속 걸어다니는 걸 좋아했다. 걸으며 이런저런 얘기들을 했다. 사무실에 앉아서 컴퓨터를 앞에 두고 하면 제대로 못할 얘기들이 걸으며 하면 술술 이어졌다.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고 직장을 걷다 보면 걷기 전보다 훨씬 가까워진 것처럼 느껴져서 괜히 마음이 벅찼다. 가끔은 이유 없이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이날도 주황빛으로 물드는 하늘을 바라보며 벅찬 기분이 들었다. 내가 2022년까지 살아서, 1월 1일의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구나, 2012년에도, 2002년에도, 나는 이런 오늘을 짐작하지 못했었는데.

 

저쪽에 보이는 월파정.
얼어붙은 호수에 비친, 잔뜩 길어진 해.
같은 풍경을 붉게도 찍어보고, 푸르게도 찍어보고 나면, 뭐가 실재인지 모르겠다는 심정이 든다.

올해도 나는 호수공원을 걷고, 일산의 이곳저곳을 걷고, 하늘을 보고, 해를 보고, 사진을 찍겠지. 마스크 안 쓴 사람을 보면서 짜증내고, 종종 걸음수를 체크하고, 가끔 운동화끈을 묶겠지. 화목금요일이면 그날 다운받은 요팟시나 그알싫을 들으며 낄낄대거나 절레절레하겠지. 심란한 날에는 덜 심란하고 싶어서 걷고, 기분 좋은 날에는 더 기분 좋고 싶어서 걷겠지. 그러면서 하루하루를 또 쌓아가겠지. 2022년도 작년처럼 힘든 일이 계속되겠지만, 한발한발 어떻게든 걸어갔으면. 코스 전체를 쉼 없이 달려가려고 욕심부리지 않았으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잘 걷자, 나자신아. 2022년 안녕 :)

 

새해에도 여전히 좋은 김미묘님의 일러스트. 내 소중한 사람들, 모두다 햅삐뉴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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