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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드는 바람/보고

[TV] 그동안 고마웠어, 프런코2.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 시즌2가 어제 드디어 끝났다. 열두시 땡 되자마자 본방을 본 후 재방을 한 번 더 봤는데도 아직 아쉽고 서운하다. 그동안 덕분에 즐거웠어! 하고 쿨하게 굿바이하기가 힘들다. 아아, 앞으론 재방만 보란 말이니? 라는 마음이 훨씬 더 크다.

뭐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이라고 하기엔 좀 웃기기도 한데ㅎ 첫 회를 봤을 때부터 우승자는 정고운이 될 것 같았다. 그녀의 독특한 아우라, 다른 참가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자신감, 심사위원들의 극찬, 거기에 '시즌1 출연자들이 꼽은 시즌2 우승후보'라는 미디어의 입놀림까지 더해진 탓이었을 게다. 2회 때 그녀가 우승을 연이어 차지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예감은 더욱 강해졌고, 강력한 우승 후보라 생각했던 윤세나가 4회 때 탈락하는 모습을 보며 예감은 확신으로 바뀌어 버렸다. 너무도 빨리. 흐아.

파이널리스트 3인으로 정미영과 최형욱, 정고운을 꼽게 된 건 6회 즈음이었다. 여섯 번의 런웨이를 계속 보면서, 그때까지 우승을 나눠 가졌던 정고운(1, 2회), 윤춘호(3회), 정미영(4회), 최형욱(5, 6회) 이외의 다른 디자이너가 '갑자기 치고 올라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과 나머지 참가자들 사이에 어느 정도의 격차가 확실히 생겼달까. 우승 경험자 넷 중 가장 기복이 심했고 완성도가 떨어져 보였던 후보가 윤춘호였기에 정미영, 최형욱, 정고운을 아무 의심 없이 꼽을 수 있었다.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프로듀서들도 파이널 컬렉션 클로징 무대를 정고운의 몫으로 돌렸겠지. 그녀의 우승을 짐작하면서.

파이널리스트 3인-정미영, 최형욱, 정고운. 이미지 출처는 www.onstylei.com.
 
 

예상대로 정고운은 우승자가 되었고, 최형욱은 2인자가 되었다. 그럴 거라고 쭉 생각해 왔으면서도, 이소라의 입에서 "정고운씨, 축하합니다"라는 말이 나왔을 때에는 좀 아쉽고 허전했다. 정고운이 싫어서, 혹은 정고운이 우승할 만한 사람이 아니어서? 그렇진 않다. 부실한 결과물을 만들어놓고도 TOP3를 운운하던 참가자들과 달리 언제나 일정 수준 이상의 작품을 만들어내고 또한 자신의 작품에 큰 자신감을 보이던 정고운은 우승자로서의 자격이 충분했다. 그녀를 보면서 아주 잠깐 동안 부럽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꽤 오랜만에 '천부적 재능'이라는 말을 떠올려보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최형욱을 더 응원했던 것은 아마도 '너무나 강력한 우승 후보에 맞서는 참가자'라는 그의 위치와 프로그램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겸손함, 그리고 정고운의 옷보다 나의 취향에 더 잘 맞는 그의 옷 때문일 테다. 정고운과 최형욱 둘다 모던하고 세련된 스타일을 보여주었지만, (소비자 혹은 수용자로서의) 내게는 우아하고 페미닌한 정고운의 옷보다 중성적인 느낌이 있으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최형욱의 옷이 더 흥미로웠다. 자신이 잘하는 것을 미션에 끼워맞춰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 하기보다는 주어진 미션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보려고 노력하던 모습 역시 인상적이었고, 함께하는 동료들을 다독이고 염려하고 배려하면서 이 무시무시한 '서바이벌 리얼리티'를 든든히 받쳐나갔다는 점 역시 그에게 플러스 점수를 줄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그리고 사실, 난 늘 1등보다는 2등에게 마음을 주는 사람이다. 흣.

 
6회 때의 최형욱, 김지혜, 정고운. 이 훈훈한 분위기가 참 좋았다. 이미지 출처는 역시 www.ontylei.com
 

이것 역시 프로그램이 끝난 지금에서야 하는 불평인데, 최형욱의 심사평에 대해선 솔직히 좀 불만스럽다. 특히 김석원씨. 너무 컨셉츄얼하다, 일차원적인 접근이다, 상상력이 부족하다 등등의 비판을 최형욱에게 하곤 했는데...그만큼 미션에 충실하려 했던 거라고 읽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오히려 난 그렇게 지적받은 작품들을 볼 때마다 상상력 부족보다도 '창의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압박'을 더 많이 느껴서 안타까웠는데. 마지막 회에서 간호섭 교수님이 하셨던 말,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만 취하면서 임팩트있게 가라는 그 말이 더 최형욱에게 어울리는 조언 아닐까.

 

한마디 더. 7회 이후로 최형욱이 '이거다!' 싶은 모습을 딱 보여주지 못했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래도 후반부의 의상들이 약간 과소평가되었다는 느낌이 없는 건 아니다. 특히 웨딩드레스 미션 때의 결과물은 그렇게까지 비판받을만한 작품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약간 벙벙하긴 했지만 그래도 꽤 귀여웠다규. 때로는 김석원 씨가 잠재력을 갖춘 남자 디자이너를 견제하는 건가 의심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건 정말 유치한 공상이고ㅋ

 

여전히 나는 패션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크게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며, 의상을 통해 나를 표현하는 것을 꽤 어색해하는 인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런코2를 보는 동안 패션에 대한 생각이 아주 조금은 바뀌었다. '패션'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기존의 내가 떠올렸던 건 특정한 브랜드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원래의 가치보다 과대평가되고 있는 어떤 것, 유행이라 이름붙은 것을 주도하는 자본의 거대한 바람에 휩쓸려 끝없는 소비를 칭송하게 유도하는 무언가, 혹은 대량생산된 '기준'에 자신을 끼워맞추게끔 강요하고 마른 몸매에 대한 비이성적이면서도 맹목적인 열광을 부추기는 그 무엇이었다. 하나같이 다 부정적이기 짝이 없는-_- 하지만 지금은 패션이 가진 '자기 표현'으로서의 역할에 대해 예전보다 조금은 더 긍정할 수 있게 되었다.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으허허.

어쨌든 그동안 덕분에 즐거웠다. 패션의 ㅍ자(정확히는 F라고 해야겠지만ㅎ)에도 관심이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던 내가 이렇게 이 프로그램을 닥본사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프로젝트런웨이는 그냥저냥 대충 봤고, 시즌1에도 별 관심 없었는데(그저 '최혜정이 예쁘구나' 정도의 생각뿐?). 당당한 우승자 정고운, 계속 응원했던 최형욱, 여성을 아름답게 해 주는 옷을 만들겠다던 정미영, 잘생기고 독특하고 귀여웠던 김지혜, 많은 이들을 자주 웃겨주었던 윤춘호, 그 외 나의 토요일 밤 열 두시를 즐겁게 해 주었던 모든 디자이너들. 부디 당신들이 원하던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꿈'을 꼭 이루는 디자이너들이 되시기를. 그동안 고마웠어요, 프런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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