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드는 바람(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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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나팔꽃
이 시를 처음 읽고 든 애틋함을,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우리 아버지도 시인의 아버지처럼 꽃으로, 꽃이 아닌 그 무엇으로라도, 다시 피어나시고 태어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pause. 내게는 이런 게, 詩인 것 같다. 그리고 그 암전의 경험 때문에, 나는 시를 읽는 것 같다. 나팔꽃 정호승 한쪽 시력 잃은 아버지 내가 무심코 식탁 위에 놓아둔 까만 나팔꽃 씨를 환약인 줄 알고 드셨다 아침마다 창가에 나팔꽃으로 피어나 자꾸 웃으시는 아버지.
2013.04.22 -
[김소연] 이것은 사람이 할 말
이것은 사람이 할 말 김소연 늙은 여가수의 노래를 듣노니 사람 아닌 짐승의 발성을 암컷 아닌 수컷의 목울대를 역류하는 물살 늙은 여가수의 비린 목소리를 친친 감노니 잡초며 먼지덩이며 녹슨 못대가리를 애지중지 건사해온 폐허 온몸 거미줄로 영롱하노니 노래라기보다는 굴곡 노래라기보다는 무덤 빈혈 같은 비린내 관록만을 얻고 수줍음을 잃어버린 늙은 여가수의 목소리를 움켜쥐노니 부드럽고 미끄러운 물때 통곡을 목전에 둔 부음 태초부터 수억 년간 오차 없이 진행되었던 저녁 어스름 그래서 이것은 비로소 여자의 노래 그래서 이것은 비로소 사람이 할 말 그래서 이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를 우노니 우리가 발견한 당신이라는 나인 것만 같은 객체에 대한 찬사 살면서 이미 죽어본 적 있었다던 노래를 노래하노니 어차피 헛헛했다며 ..
2013.04.06 -
[윤성학] 소금 시
꾸역꾸역 읽어내려가다가, '울지 마라'라는 구절 때문에, 결국은 울컥 하고 마는 시. 나 역시, 소금 병정에, 불과하니까. 소금 시 윤성학 로마 병사들은 소금 월급을 받았다 소금을 얻기 위해 한 달을 싸웠고 소금으로 한 달을 살았다 나는 소금 병정 한 달 동안 몸 안의 소금기를 내주고 월급을 받는다 소금 방패를 들고 거친 소금밭에서 넘어지지 않으려 버틴다 소금기를 더 잘 씻어내기 위해 한 달을 절어 있었다 울지 마라 눈물이 너의 몸을 녹일 것이니
2013.03.26 -
[조은] 언젠가는
지금 내 삶이 웅덩이 물처럼 말라버리지 않기를. 부디. 언젠가는 조은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그땐 내가 지금이 자리에 있었다는 기억 때문에슬퍼질 것이다수많은 시간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꽃들이 햇살을 어떻게 받는지꽃들이 어둠을 어떻게 익히는지외면한 채 한 곳을 바라보며고작 버스나 기다렸다는 기억에목이 멜 것이다때론 화를 내며 때론 화도 내지 못하며무엇인가를 한없이 기다렸던 기억 때문에목이 멜 것이다내가 정말 기다린 것들은너무 늦게 오거나 아예 오지 않아그 존재마저 잊히는 날들이 많았음을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기다리던 것이 왔을 때는상한 마음을 곱씹느라몇 번이나 그냥 보내면서삶이 웅덩이 물처럼 말라버렸다는기억 때문에 언젠가는
2013.02.18 -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히가시노 게이고, 현대문학, 2012)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우선 예쁜 표지가 눈길을 사로잡는 책이다. 고양이 한 마리가 지붕 위에 앉아 있는 이층의 잡화점, 선반마다 진열된 잡화들과 잡화점 앞에 서 있는 빨간 자전거는 아기자기한 생활의 느낌을 준다. 'OPEN'이라는 팻말이 걸린 녹색 문은 빼꼼 열려 있고 NAMIYA라는 분홍색의 잡화점 이름은 소박해 보인다. 별이 총총 떠 있는 밤하늘의 짙푸름과 대비되는 황토빛의 불빛은 따스하기 그지없다. 참 예쁘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저런 잡화점을 만날 수 있을까, 과연? 삼청동이나 서교동에서 카페나 베이커리 간판을 걸고 있는 곳이라면 모를까, 70세가 넘은 할아버지가 기타로 필통이나 창호지나 볼펜을 팔고 있는 잡화점으로는 절대 만날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 소설을 읽은 후의 느낌도 그와 같았다...
2013.02.13 -
굿바이 동물원 (강태식, 한겨레출판, 2012)
굿바이 동물원 꿈과 환상의 나라 세렝게티. 야생이 살아 숨 쉬는 세렝게티. 행복해요, 세렝게티. 즐거워요, 세렝게티. 우리는 언제나 세렝게티. 한겨레출판에서 나오는 한겨레문학상 수상작들 중 16회 수상작까지 총 네 권의 책을 읽었다. 4분의 1 꼴이니 겨우 25퍼센트 읽은 거라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에는 이러이러한 특징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만, 내가 읽은 네 권은 모두 유머러스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물론 그 유머의 느낌은 모두 달랐다만-때로는 유쾌한 상상력에서 발현되는 것이었고, 때로는 따뜻한 인간미가 느껴지는 것이었으며, 또 때로는 지독한 현실을 비틀어 짜낸 유머였다-어쨌든 '읽는 과정'에서는 몇 번이나 피식 피식 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1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역시, 웃으며 재미있게 읽을 수..
2013.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