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드는 바람(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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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 무더운 여름 (2009, 문학동네)
무더운 여름 위화 지음, 조성웅 옮김/문학동네 학생 시절에 문학 관련 수업을 들을 때마다 자주 들었던 얘기 중 하나. 단편 소설은 짧은 소설이고 장편 소설은 긴 소설이지만, 단편 소설과 장편 소설의 차이는 단지 그 물리적 길이뿐만이 아니라는 것. 단편 소설은 짧기 때문에 인간 내지는 삶의 한 부분을 아주 특징적이고 압축적으로 포착할 수 있어야 하고, 장편 소설은 긴 분량 속에서 입체적인 인물의 총체적 삶을 개연성있는 이야기와 치밀한 구성을 통해 종합적으로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뭐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분량상 분명히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우연에 의존한 이야기, 단편적인 인물의 모습, 허술한 구성으로 이루어진 소설이 워낙 많은 탓에, 장편 소설과 단편 소설의 성격을 떠올리며 작품을 읽는 일은 별로 ..
2010.02.14 -
[김승희] 장미와 가시
장미와 가시 눈먼 손으로 나는 삶을 만져보았네 그건 가시투성이였어 가시투성이 삶의 온몸을 만지며 나는 미소 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라고 장미꽃이 피어난다 해도 어찌 가시의 고통을 잊을 수 있을까 해도 장미꽃이 피기만 한다면 어찌 가시의 고통을 버리지 못하리요 눈먼 손으로 삶을 어루만지며 나는 가시투성이를 지나 장미꽃을 기다렸네 그의 몸에는 많은 가시가 돋아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한 송이의 장미꽃도 보지 못하였네 그러니, 그대, 이제 말해주오 삶은 가시장미인가 장미가시인가 아니면 장미의 가시인가, 또는 장미와 가시인가를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라는 기대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내 눈 앞에 장미꽃이 나타나지 않더라도, 그냥 나는 가시투성이가 된 채 죽을 수밖에 없더라도, 누..
2010.02.12 -
[9와 숫자들] 석별의 춤 (+그리움의 숲)
9와 숫자들 - 9와 숫자들 9와 숫자들 노래/ 파고뮤직 처음엔 그림자궁전 스타일의 음악을 예상했다. '9와 숫자들'이라는 밴드 이름이 그림자궁전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을 듣기 전에 을 다시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아 느낌 좋다, 정도였는데 이번에 마음먹고 들어보니 왜이렇게 맘에 드는지. 장난스럽다고 생각했던 가사들이 콩콩 와닿고, 미묘한 어감이 혀끝에 구르고. 특히 광물성여자와 She's Got the Hot Sauce는 너무 좋아서 한참을 들었다. 인제 되겠다, 싶을 때 9와 숫자들 CD를 넣었다. 첫곡 나오는데 당황했다. 두 번째 곡 나오는데 멍했다. 세 번째 곡 나올 때야 웃음이 나왔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외치고 말았다. 마치 아는 사람인 것처럼, "아니 ..
2010.02.06 -
100123 음악취향Y 콘서트 @살롱 바다비 (2)
이어지는 후기. 김마스타 다음으로 무대에 오른 뮤지션은 오소영언니. 오보에를 연주한 이소림 씨와 함께 무대에 올라 소박하지만 따뜻한 무대를 꾸며 주었다. 1집의 기억상실과 바람을 먼저 이어 불러주었는데, 기억상실도 좋았지만 바람이 정말 너무 좋았고,'난 이렇게 배고프고 더러운데 쉴 곳이 필요해 어디로 가야 할까 도대체 내가 있는 여기는 어딘거야'라는 가사의 기억상실과 '나쁠 건 없지 그래 더 나빠질 순 없어 이젠 털고 일어나 웃어보는 거야 그래보는 거야'라는 가사의 바람이 이어지니 묘하게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덜 박힌 못도 듣고 싶었지만 1집 노래를 세 곡이나 듣고 싶어하는 건 욕심이고! 2집의 노래 중에선 끝없는 날들과 Soulmate가 이어졌다. 끝없는 날들은 어찌나 아름답던지..
2010.02.01 -
100123 음악취향Y 콘서트 @살롱 바다비 (1)
1월 23일 토요일, 바다비에서 음악취향 Y에서 선정한 뮤지션들과 함께하는 두 번째 Y-콘서트가 있었다. 이라는, 엄청 긴 부제가 달린ㅎ 2009년의 신인 밴드 두 팀과 그 해 훌륭한 앨범을 발매한 세 팀, 그리고 특별게스트 한 팀이 무대에 올랐다. 대충 열 시쯤 끝나리라 생각하고 갔던 공연이 열 한 시가 넘어서야 끝났을 만큼, 그리고 공연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시계 볼 생각을 못 했을 만큼 꽤 풍성하고 알찬 시간이었다. 맨 처음에 무대에 올라온 뮤지션은 조길상 씨. 이 날 처음 이름과 음악을 들어보았는데 작년 10월에 EP를 발매한 신인 뮤지션이라 했다.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며 EP에 수록된 노래들을 들려주었다. 조길상을 소개했던 음악취향 Y의 필자분은 김광석을 떠올리게 하는 목소리라고 했는데...음..
2010.01.31 -
[아일린 페이버릿] 여주인공들 (2009, 민음사)
여주인공들 아일린 페이버릿 지음, 송은주 옮김/민음사 아일린 페이버릿의 은 책을 좋아하는 이들, 특히 이른바 '세계 문학 작품'이라 불리는 소설들을 읽느라 어린 시절의 밤을 바쳤던 여성 독자들에게 꽤 흥미로울 법한 책이다. 소설 속 인물들의 굴곡 많은 삶에 마음아파하거나 분통터져했던 소녀들, 제목만 떠올려도 향수가 절로 일어나는 폭풍의 언덕,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마담 보바리, 주홍글씨...등등을 읽으며 캐서린 워쇼와 캐서린 오하라, 보바리 부인과 헤스터를 그려보던 소녀들이라면 '그녀들을 직접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해 보았으리라. 나 역시 왜 제인은 로체스터에게 돌아간 걸까, 조는 진심으로 로리랑 에이미 사이를 축복했을까, 존시는 자신을 살려준 마지막 잎새가 그림이었다는 걸 깨닫고도 건강하..
2010.01.30